경찰이 사라진 세계…"저 경찰 아닌데요"[기자의눈]
계속 되는 비위에 사기 저하…명퇴 최대, 공채 경쟁률 최저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 세계관. 웹툰 업계 1위로 꼽히는 박태준 작가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박 작가는 학원 액션물이나 범죄 누아르 장르를 다루지만, 그의 웹툰 속에는 경찰이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쓸모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에 최근 인기를 끈 '모범택시'부터 '더글로리', '국민사형투표', '비질란테', '살인자ㅇ난감'까지 모두 사적 제재를 다루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믿을 게 못 되고 판사 역시 나쁜 놈 편이다. 결국 주인공이 사적 제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최근 불거진 경찰 비위들은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법 성매매를 하다 적발되는가 하면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한 것도 모자라 불법 영상까지 촬영했다.
현직 경찰관들의 잇따른 비위에 경찰 지휘부는 '엄중 경고'에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은 지난 6일 총경급 이상 간부를 소집해 기강 해이를 경고했고, 윤희근 경찰청장도 7일 전국 지휘부 회의를 열고 특별 경보를 발령했다.
하지만 수뇌부의 바람과는 반대로 비위가 이어지고 있다. 행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출동한 동료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경찰 수뇌부가 "국민을 볼 면목이 없다"며 머리를 숙였다. 조 서울청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어떻게든 이 고리를 끊어야겠단 의지를 스스로 다잡고 있다"며 사과했다.
물론 14만명에 이르는 경찰 가운데 일부의 문제다. 하지만 비위에 따른 경찰에 대한 불신은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흐릿해진 소명 의식은 다시 비위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배경이 된다. 비위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셈이다.
경찰의 사기 저하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경찰공무원 명예퇴직자는 956명으로 역대 최대였다. 올해 상반기 순경 남자 공채 경쟁률은 9.9대 1로 20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경찰대생의 로스쿨행 역시 해마다 늘고 있다.
'치안 강국' 밑바탕은 경찰이다. 비위 문제의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경찰이 무너지고 이는 치안 공백으로 이어지게 된다. 드라마 속 경찰이 사라진 세계나 사적 제재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저 경찰 아닌데요." 최근 취재를 위해 일선서 과장에게 전화를 걸자 돌아온 말이다. 잘못 걸었는지 재차 확인했지만 맞는 번호였다. 이에 대해 그는 변호사가 됐다며 이제 더는 경찰이 아니라고 전화를 끊었다. 과거를 지운 그의 말이 자꾸만 씁쓸하게 맴도는 요즘이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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