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인가 '이상동기'인가…전문가들 "범죄 용어부터 바꿔라"

흉기난동 등 범죄 속출…전문가 "'묻지마' 용어, 도움 못 돼" 지적
미국은 '외로운 늑대형 테러' 용어 사용…당정 용어 연구 착수

한낮에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공원 인근 등산로에서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30대 최모씨가 1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관악경찰서를 나서며 사죄하고 있다. 사건의 피해자는 사건 이틀 만인 이날 끝내 사망했다. 서울 관악경찰서에 따르면 이 사건 피해자인 여성 A씨는 지난 17일 사건 발생 이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 시내 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날 오후 숨졌다. 피의자 최 모 씨에게 적용된 혐의도 변경될 예정이다. 2022.8.19/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서울=뉴스1) 서상혁 기자 = 신림역 성폭행 살해 사건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시민을 향한 무차별 범죄가 잇따르면서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묻지마 범죄의 '징후'를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일수록 '용어 재정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무차별 범죄를 '묻지마 범죄'나 '이상동기 범죄'로 규정하는 순간, 범행의 배경이 된 사회의 '구조적 원인'이 뒤로 밀려나고 범행의 수법이나 도구, 사이코패스 여부 같은 자극적인 요인만 강조된다는 것이다.

◇전문가 "묻지마 범죄, 사회적 불평등 배경 배제 용어"…이상동기 범죄도 부적절 지적

23일 정부는 신림역 칼부림 이후 잇따른 무차별 흉악범죄를 막을 후속 대책 논의에 한창이다. 전날에도 정부는 여당과 당정협의회를 갖고 '가석방 없는 무기형' 입법 등 제도 개선책을 논의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개선에 앞서 현재 정부·정치권·언론 등에서 편의상 부르고 있는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부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무차별 흉악 범죄를 '묻지마'로 규정하게 되면 범죄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 등 사회구조적인 원인은 후속 대책 논의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신림동 흉기 난동 피의자 조선(33), 서현역 흉기 난동 피의자 최원종(22)의 경우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는데, 모두 사회적 불평등에 따른 '사회 격리'가 원인으로 꼽힌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교수는 "'묻지마'라는 의미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것인데, 그렇게 규정하게 되면 범죄의 동기가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지 등 범죄의 유형 분석 등 해결책을 도출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양극화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외톨이가 된 이들이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면서 묻지마 범죄가 되는 경향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 '묻지마'식으로 몰아가면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지난해부터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를 '이상동기 범죄'로 규정하고, 관련 통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상동기 범죄'라는 명칭 역시 해당 범죄자가 어쩌다 한 번 나타나는 '특이 케이스'로 여겨질 수 있는 만큼, 무차별 흉기 난동 범죄를 담기엔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범죄의 동기를 '이상동기', 나아가 사이코패스 등으로 규정하는 순간, 나머지 배경은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된다"며 "범죄자의 특별한 성격적 문제 때문에 무차별 범죄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이 역시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차별 범죄자에 대한 이상 동기 추적, 사이코패스 점수 매기기 등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데, 범죄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라고 일침을 놓았다.

◇ 美 '외로운 늑대형 테러'·日 '히키코모리 범죄'…당정, 용어 연구 착수

미국의 경우 묻지마 범죄를 '외로운(외톨이) 늑대형 테러(Lone Wolf Terror)'로 부른다. 이민자 등 사회에서 고립된 이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로 그간 누적된 분노를 푸는 식이라는 이유에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보고 배운 지식으로 범죄를 계획하는 특징을 지녔다.

또 인종이나 성별, 국적, 종교, 성적 지향, 사회적 약자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증오심을 갖고 테러를 가한다는 점에서 '증오 범죄(Hate Crime)'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선 '히키코모리 범죄'라고 부른다. 히키코모리란 사회와 단절된 채 방이나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범죄를 예방할 대책을 만들기 위해선 범죄를 지칭할 적절한 용어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범죄 용어는 범죄의 성격, 나아가 대책까지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며 "행위의 주체를 다루는 용어도 포함돼야 범죄를 예방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호 교수는 "경찰이 후속대책으로 CCTV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서현역이나 신림역 흉기 난동이 CCTV가 부족해서 발생했나"라며 "범죄를 진단하는 용어 자체가 '묻지마'로 되다 보니 '빨리 잡아야 한다'는 식의 솔루션이 나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당정은 전날 협의회를 열고 '묻지마 범죄' 대신 '이상동기 범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정했다. 다만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를 계속 연구하기로 했다.

hyu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