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난동·성폭행 살인 왜 한꺼번에 폭발했나…"임계점 넘어선 불평등"
사회적 고립에서 시작된 범행, '은둔형 외톨이' 공통점
일본 '도리마 사건'과 닮아…"사회적 고립 대책 마련 필요"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지쳤다. 세상이 싫어졌다.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2008년 일본 도쿄에서 트럭으로 행인을 덮친 뒤 흉기 난동을 벌인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가 진술한 범행 동기다. 이 사건으로 7명이 죽고, 10명이 다쳤다. 그는 범행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 비정규직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같은 모습은 15년 뒤 한국 사회에 재현되고 있다. 최근 서울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에 이어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사건, 서울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까지 흉악범죄가 잇달아 터졌다. 사건의 참상과 직접적 원인은 제각각이지만, 피의자들은 공통된 사회적 징후를 보여준다. 이들이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이다.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흉기난동부터 성폭행 살인까지…"사회적 고립이 부른 범행"
"현실 불만, 좌절에 의한 이상동기 범죄."
지난 11일 검찰이 발표한 서울 신림동 흉기난동 살인사건 피의자 조선(33)의 범행 동기다. '게임 중독'을 앞세운 수사 결과는 논란이 됐지만, 검찰은 가족 관계가 붕괴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게임의 형태'로 발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의 범행이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됐다는 진단이다.
조선은 직장을 잃은 후 범행까지 약 8개월 동안 외출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집에서 게임만 해 온 것으로 조사됐다.
분당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의 피의자 최원종(22)의 경우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에 따른 피해망상이 직접적인 범행 동기로 조사됐다. 그러나 범행이 발현된 사회적 토양은 유사했다. 최원종은 정신질환과 원하는 고교 진학 실패 등이 겹쳐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또 디시인사이드 등 커뮤니티 사이트에 빠져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최원종은 범행 전 해당 사이트에 '칼을 들고 다니는 배달원이다' 등의 게시글을 올렸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공원에서 여성을 너클로 가격한 뒤 성폭행해 숨지게 한 최모씨(30·남) 역시 직업 없이 PC방과 자택을 오가며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의 통화 기록에는 음식 배달 외에 타인과의 교류 흔적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불평등 구조 속에 발생하는 '선진국형 범죄'
이를 놓고 불평등 심화 속에 내재된 불만이 표출된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회적 박탈감이 과거엔 개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면, 최근 들어 타인에 대한 공격과 범죄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흉악범죄가 묻지마 형태로 발생하는 건 불평등 구조가 매우 심각하다는 데서 비롯된다"며 "특히 사회 하층부에 일자리 불안정과 이에 따른 좌절감, 분노감과 정신질환 문제 등이 겹쳐 범죄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한국교정복지학회가 발간한 '한국형 분노범죄의 원인과 대응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분노범죄는 '선진국형 범죄 유형'에 해당한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빈부격차가 커진 반면 개개인의 사회 적응 능력이 약화되면서 발생하는 자괴감과 분노가 범죄로 표출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뒤 일본 사회의 모습과 닮았다.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에서는 지난 20여년간 무차별 살상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이는 거리의 악마를 뜻하는 '도리마'(通り魔) 사건으로 불리며 사회 문제로 비화했다. 도리마 사건의 주요 동기로는 처지 비관, 사회적 고립, 경제적 빈곤 등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 아키하바라 사건이다. 당시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인 가토 도모히로는 '친구도 사귈 수 없는 못난이에 인권도 애인도 없음' 등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일본의 디시인사이드에 해당하는 '2ch'에 1000건 넘게 올렸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은둔형 외톨이의 증가와 묻지마 범죄의 증가의 관계가 아예 없지는 않다"며 "일본에서도 2000년대 들어 경기가 나빠지고 청년 실업률이 높아지며 히키코모리가 늘고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병훈 교수는 "한국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고 SNS 등 디지털 미디어도 범죄를 증폭시켰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처벌 강화 방안 봇물… '대증 요법' 한계
최근 흉악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법무부는 최근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형법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책이 일시적으로 증상만 완화하는 '대증요법'으로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무차별 살상 범죄를 사회적 고립 문제로 진단하고 관련 부서를 설치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자포자기형 범죄자들은 사회적 유대의 끈이 없기 때문에 엄벌한다고 겁먹고 행동을 안 하지 않는다"며 "사회 복지 제도를 두텁게 쌓고 사회 안전망을 촘촘하게 깔아서 소외되는 사람 없도록 하는 게 중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병훈 교수는 "이리 사회의 곪은 부분을 놔둔 채 대증요법만으로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각자도생이 된 대한민국의 여러 사회 조건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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