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 못한 남편의 열등감…비극으로 끝난 50년 부부관계[사건의재구성]

'아내 살인' 70대 남성 징역 20년…판결불복 쌍방 항소
"사물변별능력 있고 의사능력도 갖춰…심신미약 기각"

ⓒ News1 DB

(서울=뉴스1) 한병찬 기자 = 아버지는 툭하면 어머니를 때렸다. 술에 취해 자녀가 보는 앞에서도 주먹을 휘둘렀고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부쉈다. 수년 전부터는 알코올 중독으로 폭력적 행동이 더욱 심해졌다.

드러난 폭력의 동기는 술이지만 그 아래에는 가족을 부양하지 못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열등감'이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간 이어진 가정폭력이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사건의 발생은 지난 2월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께 살던 딸이 우울증 악화로 병원에 입원한 그날 아버지(73)는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아버지 이씨는 그날 오후 8시부터 맥주 5병 정도를 마신 뒤 오후 9시48분쯤 귀가했다. 이후 밤 12시쯤 아내 A씨에게 "집이 당신 명의니 집을 담보로 1000만원 대출을 받아 돈 좀 달라"고 말했다.

집은 A씨가 식당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매입했다. 반면 이씨는 이따금 일용직 노동을 할 뿐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A씨가 대출 요구를 거절하며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자 이씨는 베란다로 향했다.

이씨는 그곳 수납장에서 흉기를 꺼낸 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아내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A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씨의 자식 중 한 명은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이씨는 재판에서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가 범행 후 흉기를 다시 베란다에 놓는 등 범행도구의 이용과정에서 사물변별능력을 보였다"며 "범행 이후 죄책감에 수면제를 먹고 극단선택을 시도한 것을 보면 윤리적 의미를 판단하는 의사 능력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씨는 수사기관에서 범행 당시 상황 및 A씨와의 대화 내용 등을 명확하게 진술했다. 전문 심리 위원도 이씨가 범행 당시 음주로 인해 의식이 저하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3부(부장판사 명재권)는 이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범행 당시 이씨가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이씨는 2020년 10월 "불을 질러 죽이겠다"고 A씨를 위협하며 안방 장롱에 불을 붙여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씨가 50년의 혼인 생활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피해자의 귀중한 생명을 빼앗았다"며 "혼인 관계에 기초한 법적·도덕적 책무를 원천적으로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알코올증후군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병력이 있었던 점 등을 보면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씨와 검찰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bcha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