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폭탄 맞은 동네마트 "고기·채소 다 버려야 해요"…병원도 '비상'(종합)
서울 한복판 '수재민' 속출…정전·차량 침수 피해
새벽까지 숙박업소에 '귀가포기' 직장인 전화 빗발
- 이비슬 기자, 임세원 기자,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이비슬 임세원 김성식 기자 =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 채소, 생선 전부 버려야겠어요."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래미안서초에스티지 아파트 상가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서민홍씨(58)가 흙탕물 잔해가 곳곳에 남아있는 매장 내부를 돌아보며 한 말이다. 서씨는 "어제 천둥과 번개 때문에 누전 차단기가 고장 났다"며 "계산 프로그램도 다운돼 버려서 오늘 영업을 재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서씨가 꺼내 보인 휴대전화 화면 속 전날 마트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누런 흙탕물이 40㎝ 높이로 마트 전체에 차올랐고 과자와 상품이 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어지러웠다. 촬영을 위해 이동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고여있었다.
마트 인근 래미안서초에스티지 아파트는 전날 밤 12시까지 2시간가량 정전됐다. 60대 여성 엄모씨는 "휴대전화 충전을 하지 못해서 연락도 못했다"며 "덥고 무서웠다"고 떠올렸다. 주민 박현숙씨(여·59)는 "냉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일부러 냉장고 문도 열지 않았다"며 "우리 아파트와 진흥(아파트)에 정전이 됐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서초구 진흥아파트 일대는 밀려온 흙더미와 나뭇가지, 쓰레기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상가 앞 도로에 대각선으로 멈춰 선 버스는 전날 급박했던 탈출 순간을 짐작하게 했다. 거리에는 마구잡이로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쓰레기통과 파손된 보도블록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도 3m 안까지 밀려든 진흙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깊게 쌓였다.
인근 상가와 편의점, 카페, 음식점은 아예 장사를 접었다. 한 편의점 앞에선 물에 젖은 상품 중 판매가 가능한 물건을 분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서초구청 직원들도 피해 복구 작업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서울 시내 한 가운데서 하루아침에 수재민 신세가 된 동네 주민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침수된 오토바이 시동을 걸다 포기한 주민 김영훈씨(38)는 "이런 난리가 다 있느냐"며 "전쟁통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아파트 지하상가에서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문시광씨(77)는 "45년 동안 가게를 하면서 이렇게 피해가 심했던 적은 처음"이라며 "불과 1년 전에 화재로 가게에 기계를 새로 들여놓았는데 녹이 슬면 또 못쓰게 되겠다"고 허탈해했다.
문씨가 운영하는 떡방앗간을 포함해 지하에 있는 가게 약 10곳이 전날 내린 폭우로 천장까지 완전히 잠겼다. 고인 빗물은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턱까지 가득 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상가 주민들이 펌프로 빗물을 상가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간밤 폭우에 강남세브란스 병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병원 일부 천장에서 물이 새면서 환자들이 엘리베이터 이용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날 오후까지도 건물 지하 2층에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쓰레기통을 놓아두거나 비닐로 책상을 덮어둔 모습이었다.
병원 내 식당은 이날 하루 영업을 하지 못하게 돼 불편함이 이어졌다. 다행히 환자 이송에 어려움을 겪거나 입원 환자들의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강남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산에서 물이 내려오면서 (전날) 밤에 급격히 복도 쪽으로 물이 들어찼다"며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서 밤새 배수작업을 해서 새벽 5시쯤 완벽하게 복구했다"고 말했다.
강남역과 논현역 인근 숙박업소에는 전날 밤 귀가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문의가 새벽까지 계속됐다. 한 호텔 직원은 "오늘 새벽 4시까지 직장인들의 투숙 문의 전화가 이어졌다"며 "(비 때문에) 새벽에 호텔이 잠시 정전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남역 지하상가도 전날 내린 폭우로 피해가 컸다. 입구 근처에 있는 매장 피해가 유독 심각했다. 오전 9시40분쯤 한 휴대전화 대리점 셔터를 연 사장은 바닥에 흥건한 흙탕물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강남역 9번 출구 앞 음식점이 가게 입구에 휴지를 길게 뭉쳐 빗물 차단선을 만들어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강남역에서 10년 가까이 옷 가게를 운영한 윤모씨(49·여)는 "어젯밤에 비닐에 옷을 싸서 올려놓고 가게 내부 물건들을 치웠다"며 "흙탕물이 들어와 개찰구까지 물이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전 서초구 반포동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도 피해가 역력했다. 람보르기니, 포르쉐, 벤츠 등 고가 차량이 주차된 지하 2층 벽면 약 80㎝ 높이까지 물 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청소 관리인은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몇 시간째 물을 퍼냈다"고 말했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강남역까지 이어지는 도로 사정도 심각했다. 전날 멈춰 선 차들이 편도 4차로 중 3개 차로에 어지럽게 얽혀 있어 차량 정체가 계속됐다. 견인차는 도로에 멈춘 침수 차량들을 길가로 옮기느라 분주했다. 뒤늦게 짐을 찾으러 온 차량 주인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초역 방면으로는 앞바퀴가 빠진 시내버스가 3개 차로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 버스 뒤를 1톤 포터 트럭이 들이받은 채 멈춰 서 있는 도로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정체가 계속 이어지면서 200m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10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b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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