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초등생 사건' 10년…혜진 엄마의 끝나지 않은 고통

혜진 엄마 "범죄 피해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박효순 KOVA 부회장…"피해자 지원 제도 필요"

박효순 KOVA 수석부회장과 혜진 엄마. ⓒ News1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2007년 성탄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다. 이 사건으로 '복덩이' 막내딸을 잃은 이진순씨(가명·여)는 근황을 묻는 질문에 "잘,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어요"라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짙은 웃음에도 이씨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감추기 힘든 듯 했다.

긴 세월이 지나며 점차 흐릿해진 사건이지만 피해 가족들은 10년 동안 2, 3차 피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더욱 깊게 파일 때마다 이를 옆에서 보듬어 준 이가 있다. 바로 10년 동안 이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한국범죄피해자지원협회(KOVA) 수석부회장 박효순씨다.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와 그를 돕기 위해 지원자로 만난 이씨와 박씨는 오랜 세월을 겪으며 친자매와 같은 모습이 됐다. 매일같이 전화통화를 하는 이들은 이달 중순 서로를 만나자 마자 "언니" "동생"이라고 부르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빴다.

이들의 인연은 사건이 발생한 지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12월 범인 정성현(당시 38)은 교회에서 성탄예배를 마치고 놀이터에서 놀던 이혜진양(당시 11살)과 우예슬양(당시 9살)을 유괴해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야산 등에 암매장했다. 정성현은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행적을 감추다 사건 발생 82일만인 2008년 3월 경찰에 붙잡혔다. 현재 대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정성현이 잡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으면서 국민들에게는 이 사건이 마치 '종료'된 것처럼 보였으나 한순간에 딸을 잃은 이씨 가족의 고통은 멈춘 적이 없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민들이 성금 등으로 모은 4000만원이 이씨의 손에 들어왔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보이스피싱'의 대상이 됐다. 당시 한 남성은 "잘못된 계좌로 돈이 입금됐다"고 속였고, 의지할 곳 없던 혜진양 가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그때는 전기요금 낼 돈도 없었다"고 말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을 잃은 괴로움에 시달리던 혜진양의 아버지는 사건 이후부터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난 201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당시를 기억하기 싫은 듯 "아빠도, 결국은 이 사건 때문에 간 거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억울한 '꼬리표'도 혜진양 가족을 괴롭혔다.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볼까 이씨 가족은 살고 있던 집을 매매하려 했지만 '살인사건을 겪은 가족의 집'이라는 꼬리표 탓에 문의조차 오지 않았다. 꼬리표는 이씨의 직장에서도, 혜진이가 아닌 이씨 자녀의 취업 등에도 이어졌다.

혜진양 가족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 2, 3차 피해를 입을 때 그 곁에 있던 사람은 국가도, 정부도 아닌 박씨였다. 당시 혜진양 가족에 대한 지원을 위해 이씨를 처음 만난 박씨는 때로는 친언니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이씨 곁을 지켰다. 물질적 도움이 필요하면 사비를 털어 조금이라도 지원했고, 의지할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그 옆에 있었다. 이씨는 "사건 이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긴급구제로 인한 1000만원"이라며 "이 역시도 지인이 우연히 말한 것을 듣고 직접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것보다도 언니가 정말 많이 도와줬지"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박씨와 함께 한 내내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요즘 잘,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농담을 하다가도 10년 전 그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럴 때면 박씨는 농담 등으로 이씨의 눈물을 닦아줬다.

이씨는 하늘에 있는 혜진이와 남편을 보고 온 날에도, 뉴스를 통해 각종 범죄를 접한 날에도, 대화상대가 필요한 날에도 습관처럼 박씨를 찾는다고 했다. 몇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면 당시 기억으로부터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다고 했다.

시종일관 밝은 모습의 이씨는 자리가 길어지자 "범죄로 인해 입은 가족들의 피해는 하루 아침에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평생 반복되는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 고통과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타고나길 밝은 성격인 그도 "(사건 이후)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더라"며 "아픔의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더 밖으로 나가 더 열심히 살았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이처럼 이씨가 지고 있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풀어줄까 싶어 함께 여행을 떠나고 맛집을 찾아 식사를 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은 경치를 보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잊고자 하는 이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맛있는 김치라도 담그면 동생 생각부터 난다"며 웃었다.

박씨는 최근 이씨 집에 물이 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는 인맥을 총동원, 이씨 집을 수리해주기로 했다. 또 이씨 자녀 취업 문제를 돕기 위해 자신이 대표로 있는 한식 전문 기업 나루가온에프앤씨의 일자리 역시 제안했다. 박씨는 "혜진이 가족의 미래를 위해 창업까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소 이례적인 이들의 관계에 대해 박씨는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의 눈물을 어떻게 닦아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시작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범죄 피해자들의 마음을 한 순간에 덮을 수 있다는 생각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를 깼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는 우정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범죄가 발생한 가정의 경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했다. 그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원망, 왜 우리 가족이어야만 했는가 등에 대한 생각 등이 생긴다"며 "범인을 잡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 등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결국 피해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는 그저 통로를 마련해주는 역할, 즉 기댈 곳을 마련해주고 절박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국가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면 절박함이라도 느끼지 않게 해야 하는데, 국가 시스템만으로는 현재 부족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국가의 피해자 지원 시스템이 혜진이 가족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사건 이후 비극적인 일들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안타깝다"며 "범죄 피해자가 된 것은 본인의 잘못이 아닌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국가와 민간이 함께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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