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카 성폭행했다" 윗집 주장에 옥살이…아빠 누명 벗겨준 딸

피해자는 지적장애 18세, 고모 부부가 '무고'…진범은 남편[사건속 오늘]
검경 부실 수사로 '징역 6년' 선고…거짓 진술 강요 밝혀냈지만 보상은 0

ⓒ News1 DB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피고인의 유죄라는 의심이 들어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2015년 12월 30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 깨지는 사건이 전남 곡성에서 발생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호두과자를 팔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50대 남성 A 씨에게 같은 빌라 2층에 살던 50대 여성 정 모 씨가 찾아오면서다.

당시 만취한 정 씨는 A 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더니 다짜고짜 "당신이 우리 조카 성폭행했냐?"며 행패를 부렸다. 정 씨 조카의 얼굴도 몰랐던 A 씨는 곧장 112에 신고했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경찰과 검찰의 부실 수사로 A 씨를 하루아침에 성폭행 피의자로 낙인찍었다.

"우리 조카 성폭행했다" 윗집 이웃 주장만으로 '징역 6년'

('PD수첩' 갈무리)

피해자는 지적장애 2급인 B 양(당시 18)으로, B 양은 고모 부부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정 씨와 B 양은 A 씨를 성폭행범으로 지목했고, 경찰은 이들의 진술만을 믿고 조사를 시작했다.

A 씨는 수사 내내 혐의 일체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정 씨를 무고로 고소했다. 하지만 1년 넘는 조사 끝, A 씨는 2016년 11월 30일 돌연 구속됐다.

전남경찰청과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이 A 씨가 2015년 봄부터 겨울까지 B 양을 모텔과 집 등에서 세 차례 성폭행한 데 이어 정 씨를 무고까지 했다며 죄질이 불량하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A 씨는 "제가 교도소에 있는데 검사가 불렀다. '그런 일이 없는데 왜 구속시켰냐'고 했더니 '당신이 맞고소만 하지 않았으면 불구속 조사하려고 했는데, 맞고소하지 않았느냐. 장애인이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했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성폭력 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과 무고, 주거 침입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는 2017년 3월 31일 법원에서 모든 혐의가 인정돼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A 씨는 끝까지 무죄를 호소했고, 형량을 낮추기 위한 합의안도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A 씨의 수감생활이 시작된 지 11개월이 지났을때 쯤, 마침내 A 씨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친 누명 밝혀낸 딸은 유산도…고모 부부, 결국 징역형

('PD수첩' 갈무리)

수사 기관과 법원이 믿어주지 않던 A 씨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건 그의 둘째 딸이었다.

A 씨 딸은 당시 임신한 몸을 이끌고 전남 곡성으로 찾아가 마을 주민들을 탐문하며 사실확인서를 받아냈고, 사건 장소로 지목된 모텔 CCTV까지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딸은 스트레스로 유산까지 했다고.

A 씨의 항소심 선고까지 딱 2주 남았던 2017년 9월, 딸은 성폭행 피해자인 B 양을 전남 나주에서 만나게 됐다. 그리고 이때 B 양으로부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됐다.

알고 보니 B 양을 성폭행한 사람은 고모 정 씨의 남편, 다시 말해 고모부였으며, 고모는 이를 알면서도 숨기기 위해 "A 씨에게 성폭행당했다"는 거짓 진술을 조카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정 씨는 B 양이 진술을 번복했다는 사실에 B 양의 남자 친구한테 전화해 "(A 씨가 성폭행) 했다고 밀고 나가야지. (안 당했다고 하면) 안 되지. 우리가 이겨야 해. 마지막 한 번이면 돼. 그럼 우리가 이겨"라며 증인 출석을 막으려고도 했다.

('PD수첩' 갈무리)

결국 B 양이 2017년 9월 21일 직접 법정에 출석해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가기 전에 고모가 A 씨에게 성폭행당했다고 말하게 시켰습니다. 곡성에서 절 성폭행한 사람은 고모부입니다"라고 자백했다.

정 씨는 남편이 B 양을 성폭행한 사실을 몰랐다며 "이번에 알았는데 둘이 좋아했나 보다. 내가 볼 땐 좋아했다. 나한테 전혀 말도 안 했다. 당했으면 말해야 했던 거 아니냐"고 되레 역정을 냈다. 그러나 정 씨 남편은 아내가 알고 있었다면서 "그때 이혼을 하니 마니 한참 시끄러웠다"고 털어놨다.

항소심 재판부는 같은 해 9월 29일 보석을 허가했고, A 씨는 11개월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A 씨는 "항소심 선고 직전까지 변호사들이 합의하면 감형된다고 합의하라고 했다. 근데 제가 딸한테 합의의 '합' 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감옥에서 죽겠구나'하고 죽을 결심을 하고 기다렸는데 딸이 (B 양을) 만났다는 거다. 그렇게 풀려나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후 수사기관은 재수사를 통해 2018년 9월, 성폭행 진범인 정 씨 남편에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2020년 12월엔 무고 혐의 등이 추가돼 정 씨 남편은 징역 3년 6개월, 정 씨는 징역 7년을 확정했다. B 양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9년 1월 31일, 항소심 재판부가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누명이 가까스로 벗겨졌다.

경찰, 차 블랙박스·모텔 CCTV 확보 안 해…"피해자 진술만 의존" 실토

('PD수첩' 갈무리)

A 씨 측은 경찰의 허술한 수사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재판에서 'A 씨를 범인으로 볼 증거가 없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A 씨와 그 가족들을 분노케 했다.

"A 씨가 차에 태워 모텔로 끌고 간 뒤 성폭행하고 마트 앞에 내려줬다"는 B 양의 진술이 있었지만, 경찰은 A 씨 차 블랙박스나 모텔 CCTV, 마트 주차장 인근 CCTV 등을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사건을 담당했던 박송희 당시 전남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계장은 "모텔 CCTV는 확보 안 했다. 못 했다. 통상적으로 무인텔은 (CCTV) 저장기간이 일주일 정도고 업주와 통화했을 때도 'CCTV 저장 기간이 일주일'이라고 진술했다. 이미 (사건 발생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 않으냐. 무인텔에 있는 CCTV를 확인하는 건 별로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모텔 업주는 "경찰과 통화한 기억이 없다. 나한테 전화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반박하면서 CCTV 저장 기간은 119일이라고 사실확인서에 밝혔다.

또 경찰은 주민들에 대한 탐문 수사도 하지 않았다. B 양이 "A 씨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주장에도 경찰은 의구심만 가질 뿐 A 씨가 어떻게 열쇠를 소지하고 들어왔는지, 그 열쇠를 A 씨가 가지고 있는지 등 역시 조사하지 않았다.

아울러 A 씨 카드 사용 목록에 범행 장소로 지목된 모텔 결제 내역이 없었음에도 경찰은 그를 기소해야 한다며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여러 인물 사진을 보여주고 범인을 특정하게 하는 '선면 수사'를 진행할 때도 고모인 정 씨가 B 양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찰은 정 씨와 B 양의 진술만을 토대로 판단했고, 증거 효력이 없는 거짓말 탐지기 결과만 믿었다.

수사 경찰 C 경장은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불상인 경우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지만, 이미 피해자가 가해자를 지목한 상태에서 수사를 개시하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사하는 거지 이 사람이 아닐 거라는 가능성을 두고 수사하진 않는다"고 했다.

동시에 "당시에 피해자 진술에 의존한 채로 수사 방향이 고정돼 버린 상태에서 수사하다 보니 이런 결과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실토했다.

고모 부부, 함평에서도 이웃 무고 전력…경찰 "관련 있는 줄 몰랐다"

('PD수첩' 갈무리)

A 씨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2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A 씨 측은 정 씨 부부가 과거 전남 함평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이웃을 성폭행범으로 몰았던 전력이 있던 것을 알게 됐다. 2013년 정 씨 부부는 "조카 B 양을 성폭행했다"며 동네 이웃을 무고했으나, 당시 경찰은 B 양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동네 이웃을 무혐의 처분했다.

다만 정 씨 부부에 대해서도 무고로 처벌하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곡성으로 넘어와 A 씨를 무고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이 무고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 바로 A 씨 사건의 수사 조장이자 책임자인 D 경위였다. 하지만 수사를 맡은 C 경장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D 경위에게도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적 없다고 주장했다. C 경장은 "알았다면 수사 방향이 달라졌을 거다. 당시엔 몰랐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된 것 같다"고 했다.

경찰의 수사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A 씨는 2021년 6월 18일 1심에서 패소했다. 1심 재판부는 "수사 과정에서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수사 기관이 법령,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한계를 위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수사를 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말했다.

A 씨는 포기하지 않고 즉각 항소했다. 2심 재판에서는 경찰이 A 씨 사건을 수사하면서 함평 사건 자료를 출력했고, 수사 보고서에도 첨부하는 등 함평 사건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A 씨는 2심에서도 패소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봤다. 지난해 5월, 대법원 또한 A 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A 씨는 자식과 손주들 앞에서 "제가 믿었던 경찰, 검찰, 재판부 중 누군가 하나는 짚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한 곳도 짚어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와 관련 박 계장은 "어쨌거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경찰이) 억하심정이나 원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 않냐. 저희가 수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A부터 Z까지 정도면 심증을 굳힐 만한, 유죄라고 확신을 가질만한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에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는 무죄로 판명돼서 수사 과정에서 정말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 살펴봐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뒤늦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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