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촌 '강간 상황극' 시켜놓고, 문틈으로 엿본 20대 회사원
랜덤채팅서 여성인 척 행세…옆집 알려주고 범행 유도[사건속 오늘]
강간 교사 혐의 징역 13년 형…"거짓말에 속았을 뿐" 강간범엔 무죄
- 소봄이 기자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2020년 12월 4일, 생면부지 여성을 성폭행했다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오 모 씨(당시 39)가 이날 열린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오 씨는 '강간 상황극'을 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 오 씨의 배후에는 피해 여성의 집 문틈에서 성폭행 장면을 지켜보던 '진짜 범인' 이 모 씨(29)가 있었다.
2019년 8월 5일 오후 11시쯤, 세종시의 한 원룸에서 살고 있던 여성 A 씨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A 씨는 이날 집에 오기로 한 친구가 일찍 찾아온 줄 알고 무심결에 문을 열어줬다. 이때 문틈 사이로 신장 190㎝ 거구의 낯선 남성이 들이닥쳐 자신을 성폭행한 뒤 도주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A 씨는 휴대전화마저 남성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온 뒤에야 겨우 신고할 수 있었다.
A 씨가 성폭행범의 옷차림을 정확히 기억한 덕분에 인상착의를 토대로 CCTV 추적 끝,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가해 남성이 검거됐다.
가해자인 오 씨는 A 씨의 집에서 1.5㎞ 떨어진 원룸에 살고 있었다. 오 씨는 범행 당시 입었던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긴급 체포된 오 씨는 "난 그저 피해 여성과 강간 상황극을 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며 랜덤채팅 앱에서 A 씨와 나눈 대화를 증거로 보여줬다.
A 씨의 신고와 상반되게 채팅 앱에서는 A 씨가 먼저 '강간 상황극'을 하자고 제안하며 집 주소와 공동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메시지에 따르면 오 씨가 A 씨의 문을 두드리고 "옆집인데요"라고 말하면 상황극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오 씨가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어 발길을 돌리려던 때, A 씨에게 메시지가 왔다. A 씨는 "화장실에 있었어. 검은 모자 쓴 남자야? 남자가 왜 이렇게 배짱이 없어? 문 열어주고 성관계하면 그게 어떻게 상황극이야? 올라가서 시작하세요"라며 오 씨를 붙잡았다.
이에 오 씨는 다시 A 씨의 집으로 향했고, 이번엔 문이 열렸다면서 "약속한 대로 성관계를 했다"고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도망간 이유에 대해 오 씨는 "상황극 하는 도중 현관문 쪽을 쳐다봤는데 문이 살짝 열린 틈으로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쳐 겁이 났다. 그 사이 A 씨가 신고하길래 그 남자와 한패고, 내가 덫에 걸렸구나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A 씨는 오 씨와 채팅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경찰 조사 결과, 오 씨와 채팅을 주고받은 상대의 실체는 평범한 20대 회사원 남성 이 씨였다.
이 씨는 경찰의 추궁에 채팅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장난친 건데 진짜 그럴 줄 몰랐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 씨는 랜덤채팅 앱에서 35세 여성인 척하며 '강간 상황극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를 본 오 씨가 관심을 가지며 연락해 오자, 이 씨는 자기 집 맞은편 빌라에 사는 A 씨의 집 주소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오 씨는 이 씨가 알려준 원룸을 찾아가 A 씨를 성폭행했다.
문틈 사이로 오 씨의 성폭행 장면을 지켜본 것도 맞다면서 "농담으로 한 말인데 성폭행할 줄 몰랐다. 갑자기 (A 씨가) 걱정돼 확인차 들렀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오 씨와 이 씨 모두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피해자 A 씨 얼굴 볼 면목이 없었던 경찰은 집념 있게 탐문 수사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A 씨와 같은 원룸촌에 살던 한 여성이 "여행으로 며칠 집을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현관문에 의문의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내용을 보고 너무 놀라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고 진술했다.
쪽지에는 "맨날 베란다에 앉아 담배 피우던데 가슴 XX 작더라. 사진 몇 장 있는데 잘 볼게"라고 적혀 있었다.
아울러 A 씨 역시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으나 보지 않고 버린 적 있다고 전했다. 그러자 경찰은 관내에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지 조사에 나섰다가 또 다른 피해자 B 씨를 발견했다.
B 씨는 어느 날 '남자 친구 있으세요? 호감이 있어 연락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선 단칼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후 "방 쪽 창문 잘 닫고 다니세요. 벗고 다니는 거 다 보여요. 가슴도 크시고 털도 많으시던데", "저만 간직해서 잘 보면 안 될까요?", "큰 가슴 좀 만지게 해줘요", "이거 사진 프린트해서 현관문에 붙여놔 드릴까요?", "(본 지) 몇 달 됐어요. 엊그제는 가슴을 베개에 올리고 밥 드시고. 이만하면 사실이죠?" 등 내용의 문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 씨는 B 씨 차에서 습득한 전화번호로 26차례나 성희롱 메시지를 보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이 씨가 B 씨에게 문자를 보낸 날이 바로 '강간 상황극'이 벌어진 날이었다.
특히 이 씨는 오 씨의 성폭행 장면을 지켜보는 동시에 B 씨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 씨는 두 여성을 한 번에 유린했다.
당시 이 씨는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A 씨와 B 씨를 지켜봤다. 원룸촌이라 건물 사이 간격이 좁은 탓 두 사람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이 씨는 B 씨가 남자 친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A 씨를 성폭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씨가 A 씨에게 범행을 시도한 건 8월 5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건 발생 며칠 전, A 씨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을 때 일면식 없는 남성이 다가와 채팅창을 보여주면서 "저랑 대화한 여자 맞아요?"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이 남성 또한 오 씨처럼 이 씨에게 속은 것이었다. 이 씨는 오 씨 이전에 강간 상황극을 한 차례 꾸몄다가 미수에 그치자, 계속 A 씨를 지켜보면서 범행 타이밍을 노렸다.
이 씨에게는 주거침입 강간 교사 등 혐의가, 오 씨에게는 주거침입 강간 혐의가 각각 적용됐다.
2020년 5월 12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고 인격을 존중하지 않은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며 이 씨에게 징역 15년, 오 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같은 해 6월 4일, 대전지법 형사11부(김용찬 부장판사)는 4일 이 씨의 주거침입 강간죄 등을 인정, 징역 13년을 선고했다. 동시에 성폭력 치료 그램 80시간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10년간 제한도 명령했다.
다만 검찰이 적용한 주거침입 강간 교사가 아닌 주거침입 강간죄의 간접정범으로 처벌했다. 간접정범은 다른 사람을 '도구'로 이용해 범죄를 실행할 때 적용한다. 또 재판부는 B 씨에게 음란 메시지를 보낸 혐의(통신매체이용 음란 등)에 대해서도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강간범 역할'을 한 오 씨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씨 거짓말에 속아 일종의 합의로 상황극을 하는 것일 뿐,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알기 어려웠다는 이유에서다. 또 A 씨가 소극적으로 저항한 점은 오 씨가 이를 연기로 오해했을 여지가 있다고 봤다.
오 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검찰은 즉각 항소를 제기했다. 징역 13년을 선고받은 이 씨 역시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항소 이유서에서 검찰은 "법원 판단은 여성이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다면 강간이 아니라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며 "피해자가 반항하고 겁에 질렸다면 상황극이 맞는지 의심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심 선고가 성폭력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 판결이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항소심 과정에서 오 씨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오 씨의 진술과 그가 성폭행 이후 랜덤채팅 앱을 탈퇴하고 대화 내역을 모두 삭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사 당시 오 씨는 "그 집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좀 의심스러웠다. 누군가 장난치는 거나 낚시거나, 그 집에 살지 않는 다른 곳에 사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장난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해당 랜덤채팅 앱에서 본인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성별, 이름, 나이가 허위이고 남자가 여자 행세를 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 행세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오 씨가 강간 상황극이 아니라 실제 강간이라는 점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상황극에 속았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실제로는 피해자에 대한 강간일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자기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상황들을 외면 또는 용인한 채 피해자를 간음했다"고 판시했다.
그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던 오 씨는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이 씨는 주거침입 강간죄 대신 미수죄만 인정한 부분과 A 씨와 일부 합의한 점에 따라 징역 9년으로 감형됐다.
2021년 2월 25일,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단에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변론 없이 피고인들과 검찰이 제기한 상고를 모두 기각, 형을 확정했다.
sb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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