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죽이고 싶다"…훔친 차로 시속 100㎞ 광장 돌진, 사상자 23명
불우한 가정환경, 선천적 나쁜 시력에 번번이 해고[사건속 오늘]
수첩엔 "세상 싫다" 원망 가득…5년만에 사형 확정, 교수형 집행
- 신초롱 기자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사람들이 싫어져서요. 한마디로 그냥 다 죽여버리고 싶어가지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1991년 11월 29일은 훔친 차를 타고 시속 100㎞ 속도로 여의도 광장을 질주해 23명의 사상자를 낸 '묻지마 범죄'의 원조 격인 김용제가 1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다.
사건은 1991년 10월 19일 오후 발생했다. 당시 여의도 광장은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광장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소리는 김용제가 탄 녹색 프라이드의 등장에 한순간 비명으로 바뀌었다.
김용제는 광장의 남쪽 끝에서부터 북쪽으로 차를 몰고 400m가량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사람들을 덮쳤다. 피해를 본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였다. 사고로 12세 지 모 군과 6세 윤 모 군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시민들의 옷가지와 신발, 부서진 자전거 파편에 피투성이로 얼룩졌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김용제의 차는 23명을 친 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시민들은 차 주위로 몰려들어 차 유리를 깨고 김용제를 끌어냈다. 차에서 내린 김용제는 시민들을 뿌리치고 옆에 있던 여중생을 인질로 잡았다. 흉기를 들고 "가까이 오면 찌르겠다"고 위협했다. 다행히도 흉기는 벨트 버클에 맞았고 여학생은 무사할 수 있었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김용제는 "나는 어차피 이 세상 살아 봐야 마찬가지고 돈은 돌고 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더라.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에 모든 거 생각하다가 '죽자' 그러면서 무작정 달려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용제는 무면허 상태로 훔친 프라이드 승용차를 시속 100㎞가량의 속도로 사람들을 향해 내달렸다. 김용제는 당시 눈을 감은 채 차를 몬 것으로 밝혀졌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김용제(당시 20세)는 결손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 어머니도 시력이 매우 나빴다. 김용제 역시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나빴으나 돈이 없어 안경도 못 쓰고 다닐 정도였다.
세차장, 나이트클럽, 중국집, 인형공장 등을 전전했으나 시력이 좋지 않은 탓에 실수가 잦았고 이에 따라 번번이 잘렸다. 그는 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부산의 한 신발공장에 취직했으나 얼마 안 가 또 해고됐다.
사회를 향한 원망과 울분은 고조됐다. 결국 남도 죽이고 본인도 죽겠다는 생각에 자신과 아무런 관계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향한 보복성 충동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검거 이후 반성 없는 태도를 보였던 것처럼 그의 수첩에도 세상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수첩에는 '세상이 싫다' '죽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심 재판부는 김용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시력장애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많은 사람을 죽음의 동반자로 삼기 위해 눈을 감고 차를 몰아 아무런 원한, 감정이 없는 어린이 2명을 치어 숨지게 하는 등 극도의 인명 경시 의식을 지녀 재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 사회에서 격리코자 한다"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판결에 불복한 김용제는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1992년 3월 20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도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됐다. 1992년 8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김용제는 5년 6개월 뒤인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했다. 이날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형이 집행된 적 없어 사형에 처한 마지막 사형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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