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재혼을?" 친어머니 찾아가 성폭행한 뒤 불태워 살해

보육원에 버린 모친 찾아가 패륜 짓…계부도 희생[사건 속 오늘]
"엄마 죽어 마땅해" 사형 직전까지 반성 없는 모습…안구는 기증

(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1989년 11월28일, 어머니를 성폭행하고 자살을 강요한 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산채로 불태워 살해한 악마 김영호(31)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의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존속 살인 혐의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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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19세까지 보육원에서 자란 후 범죄자의 길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19세까지 보육원에서 자란 김영호는 이후 동생과 함께 살며 서울과 부산, 목포 등지를 떠돌며 구두닦이와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둘의 벌이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범죄에 눈을 돌린 그는 절도와 쌓여만 가는 분노로 인한 폭력 행위로 구속돼 전과 5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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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적 폭행당한 아내 가출 뒤 1남 1녀 청량리 백화점 앞에 버려

이 과정에서도 결혼까지 한 그는 1남 1녀를 낳았지만, 자신의 폭행에 견디다 못한 아내는 가출을 해버렸고, 혼자 남겨진 김영호는 자신이 과거에 당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청량리의 한 백화점 앞에 내다 버렸다.

이는 그가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어릴 때 자신과 동생을 보육원에 버리고 떠난 친모 A 씨(53)에 대한 원망은 김영호의 가슴 깊숙이 못 박혀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아니 더욱 깊어진 분노의 골은 김영호를 갉아 먹기 시작했고 그는 1987년 기필코 어머니를 찾아낸 뒤 재혼한 그녀를 계속해서 찾아가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

A 씨에게도 깊은 사연이 있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불행했다. 남편은 외도를 밥 먹듯 했으며, 함께 살던 시모는 자신을 남처럼 대했다. 의지할 곳이 없던 A 씨는 결국 5살이던 김영호와 둘째 아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집을 나가버린 뒤, 15살의 나이가 차이가 나는 B 씨(68)를 만나 재가했다.

하지만 A 씨는 자식을 버렸다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을 찾아온 김 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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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모 찾아가 협박해서 받은 2100만원 사업 실패로 모두 날려

그는 남편 B 씨가 땅 판 돈 2100만원(당시 20평대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던 돈)을 김 씨에게 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물질적인 보상을 하려 노력했지만, 아들 김 씨는 이러한 돈을 받아 모두 날려 먹었고 계속해서 A 씨와 B 씨에게 돈을 요구하며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는 집에 혼자 중풍을 앓고 있던 B 씨에게 돈을 요구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주변에 있던 음료수병을 이용해 마구 때려 사망케 만든 뒤 '병사'로 신고했다.

1989년 11월25일 밤 11시 술에 잔뜩 취한 김 씨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찾아가 또 한 번의 폭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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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성폭행한 뒤 자살 강요, 산채로 불태워 살해

욕설과 폭력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서슬 퍼런 광기를 보여주며 A 씨를 성폭행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라고 강요했다. 어린 자신을 버리고 재혼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강요에 못 이겨 아들이 건넨 과도를 자기 복부에 3~4회 찌른 A 씨의 주변은 피로 흥건해졌고, 김 씨는 그런 어머니를 천으로 묶은 뒤 손수레에 눕힌 후 나뭇가지를 쌓고 시너를 뿌려 불을 붙였다.

아직 A 씨가 사망하기 전이었고, 어머니가 몸부림치며 불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확인한 김 씨는 그길로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김 씨의 도주 과정을 목격한 주민들의 신고로 김 씨의 수배는 바로 시작됐다.

사건 발생 3일 뒤인 28일, 봉천동의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자고 있던 김영호는 체포됐다. 당일 김 씨의 동생이 봉천동 일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들이 이를 확인하고 이 일대의 숙박업소를 모두 뒤졌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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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죽어 마땅해" 대법원서 사형 확정…안구는 기증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 씨는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잔인한 범행 방법 등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후 김 씨는 절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살다가 1992년 12월29일 "나는 결손 가정에서 태어나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죽어 마땅했다"라고 끝까지 반성 없는 모습을 보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 씨의 사형 집행 이후 유언에 따라 안구는 기증되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다.

khj8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