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자매, 성폭행으로 극단 선택…"신음 내봐라" 2차 가해

경찰 '피해자다움' 요구…언니 스스로 추락사[사건 속 오늘]
가해자 12명 법적 처벌 어려워…엄마 15년째 1인 시위 계속

지난 2004년 여름 양소라 씨(왼쪽, 당시 30세)는 다수의 보조 출연 배우 관리자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성폭력을 당하고,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2009년 8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동생인 양소정 씨(당시 31세)도 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줬다는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6일 뒤 뒤를 따랐다. ⓒ 뉴스1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두 딸, 남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장연록 씨는 15년 전 오늘 홀로 남았다. 집안의 보물 1, 2호였던 두 딸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 그 충격에 쓰러진 남편마저 두 달 만에 뇌출혈로 사망한 날이었다.

"언니 우리 심심한데 보조출연 알바나 갈까?"

비극의 시작은 대학원에 다니던 큰딸 양소라 씨(당시 30세)가 2004년 여름방학 때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연예계에 관심이 많았던 동생 양소정 씨(당시 26세)의 제안으로 자매는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보조출연 알바 이후 큰딸은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장 씨는 "소라가 집에서 옷을 벗고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종이를 다 찢고 '누구 죽어라 누구 죽어라' 중얼거렸다. 전형적으로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급기야 큰딸은 동생과 어머니에게 폭력성을 보였고, 가족은 경찰에 신고해 소라 씨를 정신병원에 데려갔다. 입원 후 장 씨는 딸이 집단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고 했다.

소라 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촬영 알바를 마치고 보조출연 담당자와 술자리에 동석했는데, 담당자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술을 마시게 됐다. 술을 못 먹는 체질인 소라 씨는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어지러웠고 곧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만큼 취해버렸다.

담당자는 "술 깨고 가자"며 소라 씨를 비디오방에 데려갔고, 옷을 벗겨 강간을 시도했다. 소라 씨가 반항하자 그는 "라이터 불로 지져버리겠다", "칼로 도려내겠다"고 협박해 성폭행했다.

이후 다른 보조출연 담당자가 또 소라 씨를 호출해 성폭행했고 총 12명이 추행, 강간을 저질렀다. 하지만 소라 씨는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수 없었다고.

(KBS '제보자들')

"우리 애들은 경찰이 죽였다"

큰딸의 이야기를 듣고 장 씨는 바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1년 8개월간 이어진 수사는 '혐의없음'으로 마무리됐다. 놀랍게도 소라 씨가 직접 고소를 취하한 것.

소라 씨는 조사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고 다시 그 사건들을 떠올리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취하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소라 씨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면서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대해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질문을 쏟아냈다.

소라 씨는 "모텔방 끌려갔다면서 주위 사람에게 구원 요청 안 했냐", "가해자가 그런 행위 했다는 걸 뭐로 입증할 수 있나", "가해자가 젖꼭지를 건드리고 양쪽 가슴을 움켜잡았다면서 소리라도 지르고 반항해야 하지 않았나" 등의 질문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소라 씨는 가해자들과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가벽만 사이에 두고 대질조사를 받았다,

장 씨는 "딸이 조사를 받고 경찰서 밖으로 나와 8차선 도로에 뛰어들기도 했다"며 "옆에서 (가해자한테) 다 들리는데 (성폭행 당시를) 그대로 묘사하고 신음까지 내라고 했다. 강간, 성폭행당했다고 다 자살하진 않는다. 우리 애들은 경찰이 죽였다고 저는 항상 외친다"고 울분을 토했다.

(KBS '제보자들')

"악마들의 만행 공유해달라"…여전히 홀로 싸움 중인 엄마

고통에 시달리던 소라 씨는 2009년 8월 28일 저녁 8시18분께,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 18층에서 떨어져 숨졌다. 둘째 딸 소정 씨는 자신이 언니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엿새 뒤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두 달 뒤 남편마저 잃고 홀로 남은 장 씨는 2014년 가해자 12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지만, 민법상 소멸시효인 3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성폭행 발생으로부터 9년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이에 장 씨가 해당 기획사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자, 가해자들은 장 씨를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고소했고, 검찰은 장 씨를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모녀의 고통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며 장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장 씨는 유튜브를 통해 꾸준히 가해자들의 신상과 근황을 공개해 오며 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현재까지 가해자들에게 고소당한 게 30건쯤 된다"며 "일부 가해자는 아예 일손을 놓고 저를 계속 고소하고 있으며 새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악마들의 만행을 공유해달라. 우리 딸들의 유언"이라고 호소했다.

syk1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