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서 시신 발견된 유명 회계사…'내연녀' 용의자만 여러명 등장

한강서 여행가방에 양복차림 담겨, 둔기 피살 결론[사건속 오늘]
방송 출연, 선거출마 이력…얽힌 여성들 조사에도 모두 '무혐의'

(네이버 선거정보도서관 갈무리)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1990년 11월 4일 오전 11시쯤, 반포대교 남단 150m 지점에서 한 낚시꾼이 한강 위로 떠내려가던 가로 1m, 세로 70㎝ 크기의 여행 가방을 건져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가방을 열어본 낚시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여행 가방 안에는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웅크린 상태로 숨져 있었다.

얼굴에 씌워진 비닐봉지를 벗겨 보니 남성의 안면부 곳곳에는 외상이 있었고, 오른쪽 눈 부위는 심각하게 멍 들어 있었다. 뒷머리는 흉기에 맞은 듯 2㎝가량 찢어져 있었다.

타살 흔적이 가득한 남성의 정체는 유명 공인회계사였던 임길수 씨(당시 50)였다. 임 씨 피살사건은 34년이 지난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여행 가방 안 양복 차림 숨진 남성…정체는 공인회계사 임길수

임 씨는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출연해 세무 상담을 해온 유명인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3번이나 출마하는 등 명예와 부를 겸비한 저명한 인사인 임 씨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경찰도 깜짝 놀랐다.

임 씨의 아내에 따르면 그는 10월 28일 친구를 만나겠다고 집을 나선 뒤 행방불명됐다. 이튿날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프로그램 녹화가 예정돼 있었는데, 제작진은 임 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방송국 전화를 받고 서초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결국 임 씨는 자취를 감춘 지 6일 만에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부검 결과 임 씨의 사인은 뇌출혈로, 쇠뭉치나 각목 등 둔기로 머리를 한 두차례 얻어맞아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사체의 부패 진행 상태 및 위 안의 음식물 소화 정도로 보아 임 씨는 사망한 지 5~6일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임 씨에게서 이렇다 할 반항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사망 당시 임 씨는 양복 차림이나 신발이 없는 상태로 발견됐다. 이에 경찰은 임 씨가 실내에서 급습으로 후두부를 공격당했으며 적어도 남성 한 명 이상이 낀 일당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범죄라고 파악했다.

임 씨의 주변 지인 탐문 과정에서 그의 부부 관계와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라 경찰은 금전 또는 원한, 치정 관계에 의해 임 씨가 살해됐을 거라고 봤다.

임 씨는 14년 전 결혼한 서울대 출신 여고 교사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고 있었다. 동시에 내연 관계인 김 모 씨(당시 40)와 동거하며 1남 3녀를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적어도 10여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부부 사이가 악화했고, 급기야 아내는 국세청에 임 씨의 탈세 사실까지 고발하기도 했다.

또 임 씨는 공인회계사로 10여개의 대기업과 거래하고 자문하며 돈을 끌어모았으나, 잇따른 총선 낙마와 여자들을 만나며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 당시 그의 재산은 1억5000만 원 정도에 불과했으며 살고 있던 서초 삼풍아파트도 전세 8500만 원에 살고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업무상 원한·치정 범죄 조사했지만 '허탕'…증거도 없었다

경찰이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린 이는 임 씨의 운전기사 강 모 씨(당시 35)였다. 강 씨는 10년 가까이 임 씨의 차를 운전하며 그의 스케줄을 낱낱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강 씨는 결혼을 앞두고 임 씨에게 "경제적으로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한 사연이 있었다. 경찰은 강 씨가 앙심을 품었다고 생각했으나, 강 씨는 임 씨 사망 당일 강원도로 신혼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알리바이가 확실했던 강 씨는 "거절당해 잠시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 사건은 나와 무관하다"고 진술했다. 동시에 용의선상에 오르자 자취를 감춘 임 씨의 비서 조 모 씨(당시 24) 역시 특별한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또 경찰은 임 씨에게 회계를 맡겼던 기업체의 업무상 원한 등을 고려해 회계 자료를 압수해 분석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허탕이었다.

임 씨의 아내와 내연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이 일제히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경찰은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임 씨가 여러 단체의 간부로 활동한 것과 지역 사회에서 마당발로 통한 점을 들어 원한에 의한 살인 가능성도 열어뒀지만, 범인을 찾기 쉽지 않았다.

이어진 증거물 수사에서 "일주일째 한 차가 한 곳에 계속 주차돼 있다"는 경비원의 신고로 강남의 한 종합병원 주차장에서 임 씨의 승용차가 발견됐다.

승용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차 안 바닥에는 모래와 흙이 깔려 있었다. 지문과 머리카락, 흙, 모래 등을 채취해 국과수에 의뢰했으나 특별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 News1 DB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임 씨 내연녀들…결국 34년째 '미제'

그러던 중 1991년 4월 간통 사건으로 구속된 구 모 씨(당시 40)와 그의 7세 연하 내연남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두 사람은 간통죄로 구속됐는데, 경찰이 구 씨의 소지품을 압수해서 살펴보다가 임 씨가 생전 써준 한 건의 영수증을 발견한 것이다.

구 씨는 1989년 초 세금 상담을 하다 임 씨와 알게 됐고, 이후 가깝게 지내왔다. 구 씨는 양도소득세 업무 대행 수수료 명목으로 임 씨에게 500만 원을 건넸으나 임 씨가 일을 해결하지 못하자 돈을 돌려달라고 독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경찰은 구 씨가 여러 번 이혼한 전력이 있고 부유한 전 남편들로부터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내는 등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점, 임 씨의 사체가 발견됐을 때쯤 구 씨 내연남 눈 밑에 상처가 있었던 점, 그 무렵 내연남이 임 씨와 같은 기종의 차를 몰고 다녔다는 주변인의 진술을 토대로 임 씨 피살사건과의 연관성을 집중 수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떠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또 다른 용의자가 등장했다. 당시 경찰은 A 공업사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60대 남성이 직원들에게 집단 폭행당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공업사 대표 여성인 이 모 씨(당시 40)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여기서 이 씨가 임 씨와 내연관계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 씨 역시 임 씨와 임대관리 업무로 거래하다 가까워졌고, 평소 사업 문제로 종종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씨는 1988년 10월 업무처리 비용을 요구하는 임 씨에게 "내연 관계를 폭로하겠다"며 7000만 원을 뜯어냈다고.

경찰은 이 씨가 폭력배를 동원해 청부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 조사를 진행했으나, 이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수사팀도 이 씨에게서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용의자가 나와도 매번 수사가 원점으로 돌아가 서초경찰서 수사관들을 좌절시켰다는 후문이다. 결국 사건 발생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영구 미제로 남았으며, 공소시효가 지나 범인을 검거해도 법정에 세울 수 없다.

sb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