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원 가지려고…초등 사촌동생 유괴·살해한 10대 언니

"유흥비 마련" 주범, 공범 3명 지목…강압수사 공방[사건속 오늘]
증인 98명 등장 끝에 공범 모두 무죄…주범 "입 열면 전부 다친다"

(MBC 뉴스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1994년 10월 10일 오후 12시 30분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의 한 초등학교 앞 노상에서 하교하던 10세 강 모 양이 사라졌다.

오후 4시쯤 피해자 집에는 "12일 오후 2시 30분까지 현금 200만 원을 쇼핑백에 넣어 부산극장 관람석에 갖다 놓으면 강 양을 보내주겠다"라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 왔다.

부모는 즉시 신고했고 비공개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평소 강 양의 하교 후 동선을 파악해 주변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20세 정도 된 언니와 팔짱을 끼고 갔다"는 강 양 친구의 진술을 확보했다.

유력 용의자는 사촌언니…집 안방 보자기에 싸여 숨져 있는 시신 발견

사건 이튿날 강 양의 사촌언니인 이 모(19) 양이 유력 용의자로 특정된 데 이어 13일 오전 이 양의 집 안방 구석에서 이불 보자기에 싸여 숨져 있는 강 양의 시신이 발견됐다.

조사를 받던 이 양은 공범으로 3명을 지목했다. 공범으로 지목된 이들은 대학교 1학년 A(19) 양, B 군, C 군이었다.

경찰은 4명의 피의자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 현장 검증을 완료했다. 이들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괴를 공모했다고 진술했다.

(MBC 뉴스 갈무리)

경찰 조사에 따르면 9일 밤 이 양은 강 양에게 전화해 "맛있는 음식을 사줄 테니 내일 학교 앞에서 만나자"라고 말했다.

다음 날 오전 12시 30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강 양을 프라이드 승용차로 납치했다. 테이프로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뒤 시내를 돌아다니다 오후 4시쯤 남포동에서 강 양의 집으로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었다.

강 양이 차 안에서 보채자 국제시장 부근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이 양과 A 양은 밖에서 망을 보고 C 군과 D 군이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공범 3명 돌연 진술 번복, 경찰 강압수사 의혹 제기…치열한 법 공방

이후 검찰은 4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미성년자 유인), 사체은닉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사건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으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혐의를 모두 인정했던 공범 3명이 진술을 번복하면서다.

이들은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라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이들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통화기록, 증인 등을 동원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강압 수사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과 검찰은 10월 9일 커피숍에서 4명이 모여 유괴를 모의했다는 이 양의 진술을 토대로 127일에 걸쳐 총 98명의 증인을 내세우며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B 군은 범행 당일 여자친구 조카 운동회가 열리는 대구에 갔다고 주장하며 사진과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 측은 합성 가능성을 제기하며 해당 사진의 증거 능력이 떨어진다고 반박, 조작된 알리바이라고 주장했다.

공범 A 양 역시 유괴가 벌어지던 당시 학교 타자실에서 영어 타자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변호인을 통해 시험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검찰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같은 과 학생 박 모 양(가명)을 증인으로 신청하며 변호인 측 주장에 맞섰다. 박 양은 시험이 치러지던 그날 A 양의 부탁으로 자신이 대리 시험에 응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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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교사와 다른 학생들의 입에서 박 양의 주장과 배치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시험 시간에 A 양을 봤다는 학생은 16명에 달했다. 시험 감독관이었던 조교와 학교 친구들은 '대리시험은 불가능하다'며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반박했다.

그렇다면 박 양이 위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A 양의 알리바이를 깰 목적으로 거짓 증언을 사주한 배후가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상가 밀집 대로변서 범행" 이 양 진술에 모순…변호인 측 주장에 힘 실려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검찰의 공소 사실에 따르면 이 양은 "페인트 가게 옆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강 양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이 양이 범행 장소로 지목한 페인트 가게 인근은 금은방, 중국집, 은행 등 상가가 밀집한 대로변 초입이었다.

변호인 측은 행인과 차들의 통행이 수시로 이루어졌기에 이곳에서 살인이 이루어졌다고 보기엔 어렵다고 변론했다.

검찰은 또 다른 증거로 범행에 쓰인 차 안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에 대한 DNA 감식 결과를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강 양의 머리카락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범 측 변호인은 법정에 선 이 양을 향해 날 선 질의를 쏟아냈다. 변호인은 "사건 당일 피고는 사촌동생을 유인해 B 군이 준비해 온 차에 태웠다고 진술했다. 맞나"라고 물었고 이 양은 "네"라고 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냐"는 물음에는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어 "왜 죽였나. 돈을 주면 돌려보내겠다는 아이를 왜 죽였냐.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냐"는 질문에는 "A 양이 죽이자고. 커피숍에서. 다 같이 있었다"라고 했다.

변호인은 "4명 모두 커피숍에 있었고 그곳에서 A 양이 죽이자고 제안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냐"는 질문에 이 양은 "저는 그냥 돌려보내자고 했다. 정말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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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이 커피숍에 있던 그 시간 강 양은 어디에 있었냐"는 질문에 "차에 있었다. (혼자)"라고 했다. 변호인이 "혼자 차에 있던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걱정되지 않았나"라고 묻자 이 양은 "그래서 지켜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다 보였다"라고 진술을 이어갔다.

이때 변호인 측은 커피숍 내부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사진이 공개되자 법정 안은 크게 술렁였다. 커피숍 벽면에는 창의 형태는 있지만 막혀 있어 밖을 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유괴, 살인을 모의했다는 이 양의 진술 또한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속속 나오면서 변호인 측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다시 증인대 오른 증인 "그땐 그럴 수밖에" 위증 인정…배후로 '경찰' 지목

재판은 어느덧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법정에는 앞선 공판에서 A 양의 부탁으로 대리시험을 봤다고 증언한 박 양이 다시 증언대에 올랐다.

박 양은 "증인은 사건 당일 친구 A 양의 부탁으로 대리시험을 치러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맞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아니다. A 양이 직접 쳤다"라며 진술을 바꿨다.

박 양은 "지난 재판에서 위증한 거냐"라는 질문에 "죄송하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박 양은 배후로 '경찰'을 지목했다.

그는 "대리시험 친 적 없다고 했더니 (경찰이) 욕을 하면서 다그쳤다. A 양이 이미 다 자백을 했는데 왜 거짓말하냐고. 네가 범인보다 더 나쁜 X이라더라. 제발 A 양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라며 "전화를 바꿔줬다. A 양이 그러더라. '나 너무 힘드니까 그냥 경찰이 하라는 대로 해줘'라더라"고 말했다.

B 군 역시 경찰의 강압수사를 주장했다. 경찰은 사건 초기 C 군이 아닌 박 모 군(가명)을 공범으로 지목하고 수배를 내렸다. 수사 결과 박 군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 범행에 가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찰은 B 군이 지목한 C 군을 기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B 군 변호인의 변론 요지서에는 "조사관은 B 군이 박 군을 '모른다'고 대답했다는 이유로 주먹과 각목으로 전신을 구타했다. B 군은 본인이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을 지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기록돼 있다.

B 군 역시 법정에서 "그때 순간적으로 C 군이 떠올랐다. 아는 사람 중에 'O'자로 끝나는 이름이 형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변호인들이 고문 피해를 주장하며 신체 검증을 신청하자 재판부는 공개 검증을 실시했다. 당시 1심 재판장은 판사실로 피고들을 데려가 육안으로 팔꿈치, 무릎 등에 멍 자국을 직접 확인한 뒤 조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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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재판 시작 3개월 만인 1995년 1월 12일 오후 재판장 직권으로 이례적인 현장 재검증을 실시했다.

당시 이 양은 "차량을 세워둔 곳이 이 골목 맞냐"는 판사의 물음에 "저는 망을 본다고 나왔는데 사실 망을 본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차를 세워둔 곳이 여기 맞냐"라고 재차 묻자 "잘 모르겠다"라고 했고, "살해 장소가 어딘지 모른다는 말이냐"는 물음에 "네. 지금 현재는요"라는 애매한 말을 남겼다.

A 양 역시 "이 골목을 범행 장소로 지목한 게 맞냐"는 질문에 "그냥 아무 데나 오다 보니까 골목이 있어서 그냥 여기라고"라고 말했다.

최종 확인 결과 피고인들이 협박 전화를 걸었다는 커피숍에서는 강 양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는 발신 내역 조차 없었다.

13번 공판 끝에 이 양 무기징역·공범 3명 무죄…가혹행위 경찰 3명 징계

1995년 2월 24일 부산지법에서 진행된 1심에서 재판부는 공범 3명이 제기한 알리바이와 가혹행위 주장을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양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했다.

1심 선고 이후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1995년 12월 8일 대법원은 무죄를 받았던 3명에 대해 원심 그대로 무죄를 확정했고 이 양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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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를 받은 3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가혹행위를 했던 경찰들에 대해서도 징계가 이루어졌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가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는 14명의 경찰 수사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용의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 3명에 대한 독직폭행죄 선고 공판에서 A 경장에게 징역 1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나머지 2명에게는 징역 8개월,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2년이 각각 선고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이 양은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 전부 다친다"라며 의미심장한 발언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다.

ro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