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수용만 23년, 70만원 주고 풀어줘"…37년 만에 드러난 진실

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닮은꼴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진실규명
1987년 신민당 조사 시도 무산 뒤 첫 규명

9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사건 진실규명 결정 기자간담회에서 피해자 이영철(가명)씨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남해인 조유리 기자 = "1998년에야 시설에서 나오게 됐어요. 70만원을 주며 조치원역에 내려주더라고요. 시설에서 산 세월만 총 23년입니다."

이용철(가명·66) 씨가 처음으로 시설에 강제 수용된 건 1973년 가을이었다. 대구역 대합실에 앉아있던 그에게 "따라오라"는 대구시청 직원들의 말을 듣고 따라 갔더니 그는 탑차에 실려 '대구시립희망원'으로 끌려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상경한 그는 식당 설거지, 중국집 배달, 공장 생산직 등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구시립희망원으로 끌려간 뒤로 부랑인 취급을 받았다. '원복을 깨끗이 세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밖을 내다볼 수 없는 방에서 30명과 함께 생활했다.

약 한 달 후, 어머니에게 인계돼 퇴소할 수 있었지만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다음 해 용산역 대합실에서 또다시 단속된 그는 서울시립아동상담소에 다시 강제수용됐다. 이후에도 서울시립갱생원, 대전 성지원과 충남 연기군 양지원에 수용돼 총 23년을 수용시설에서 보냈다.

이 씨는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6일 열린 제86차 위원회에서 이 씨의 사례를 포함한 '서울시립갱생원 등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조사 신청인 13명)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대전 성지원·연기군 양지원), 경기 성혜원 4개소는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1년 구걸행위자보호대책, 1987년 보건사회부훈령 제523호 등 부산 형제복지원과 동일한 정부 시책에 의해 운영된 성인부랑인수용시설이다.

진실화해위는 이곳에서 경찰과 공무원에 의한 강제 수용, 본인 의사에 반하는 '회전문 입소'(여러 시설에 돌아가며 강제 수용), 폭행과 가혹행위, 독방 감금, 강제 노역 등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실을 확인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1987년 인권침해 실상이 폭로돼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당시 이 4개소는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고 부랑인을 계속 수용했다.

1987년 2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이 부산 형제복지원에 이어 충남 천성원에 대해서도 현장 방문조사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시설 측이 정문을 막고 국회의원과 기자 등을 폭행하려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조사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에서 형제복지원 조사 과정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던 지방자치단체와 경찰 등 공문서와 수용자 신상기록카드 등을 입수해 국가 책임을 규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에서 지방자치단체와 경찰 등 공문서와 수용자 신상기록카드 등을 입수해 국가 책임을 규명했다. 사진은 서울시의 '부랑인 단속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 (진실화해위 제공)

조사 결과 정부는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경찰·공무원 합동 단속반에 의한 불법 단속과 강제 수용을 지속했다. 민간 법인에 시설 운영을 위탁하며 감금·폭행·강제 노역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방치했다.

또 △도시 재건 사업 투입을 목적으로 '새서울건설단'에 동원 △규칙 위반자에 대한 '신규동' 독방 감금 △시설 간부 등의 구타로 인한 폭행치사 사건 발생 △시설 사망자 시신을 해부실습용으로 교부 △연고지와 무관한 수용자 강제 전원 등 사실이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는 37년간 은폐된 전국 부랑인 수용 시설 인권침해 실상을 최초로 종합적으로 규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피해자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실질적인 피해 회복 조치에 나서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시설 수용 인권 침해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다른 집단수용시설 피해까지 회복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hi_na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