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미투' 단톡방 순식간에 70명 입장…'자력구제' 나선 여성들
1020 여성들, 피해 상황 정보 공유·추가 범죄 차단 노력
"관심 사그라들면 처벌 흐지부지될까 우려…책임감 생겨"
- 박혜연 기자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합성 영상이 만들어졌으면 어떡하지?"
경기도 소재 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A 양은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알게 되면서 공포심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A 양이 다니는 학교에도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가 있다는 소식이 돌았다.
"내 신상이 벌써 다 털려서 실제로 피해를 입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걱정된 A 양은 소수 친구들이 모인 단체대화방에 사건을 정리해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A 양의 친구들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이 알리고 싶다며 각자 지인들을 단체대화방에 초대했고, 대화방 인원은 순식간에 70명을 넘었다.
A 양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보니 자료가 꽤나 많이 모여서, 이 학교들을 X(엑스·구 트위터)에도 올리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메모장에 정리해 글을 올리게 됐다"고 전했다.
A 양이 피해 학교 명단을 정리해 올리자 A 양에게 제보가 쏟아졌다. A 양은 "글을 올린 다음날 제보글이 20개 넘게 왔다"며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이 왔다"고 했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A 양과 같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추가 피해를 막고자 한 여성들의 연대가 있었다.
특히 딥페이크 사건 피해자들이 집중 분포돼 있는 1020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역할하면서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직접 '자력 구제'에 나섰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대학생 B 씨 역시 X에 제보받은 피해 사례나 피해 학교 소식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누리꾼 중 한 명이다.
B 씨는 "졸업한 중·고등학교와 재학 중인 대학교가 모두 피해 학교로 지명되는 걸 보면서 이 문제가 마냥 남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B 씨는 "피해 지역과 학교를 정리하던 중 많은 분들이 함께 분노하고 계속해 공유해주시면서 자연스럽게 이목이 집중돼 널리 알릴 수 있었다"며 "각 지역 거주 중인 분들이 지속적으로 제보도 해주신 덕분에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계속 추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인 A 양과 B 씨가 개인 시간과 노력을 들여 딥페이크 사태를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서게 된 것에는 책임감이 작용했다. B 씨는 "중간에 손을 떼게 되면 행여나 이 일에 대한 주목도가 사그라들어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흐지부지 사건이 종결되는 일이 생길까 싶었다"고 말했다.
A 양은 "사람들이 이 범죄를 가볍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게 가장 문제"라며 "제대로 된 대처법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개개인이 자력 구제에 나서는 현실은 그만큼 사회나 정부, 수사기관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5월 서울대에서만 피해자 12명이 나온 딥페이크 성범죄는 '추적단 불꽃' 활동가인 원은지 씨가 직접 2년간 텔레그램방에 잠입해 주범 박 모 씨(40)의 실체를 잡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울여성회와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는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역에서 집회를 열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사건의 규모를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기보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박예림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실제 상담 현장에 찾아오는 피해자들도 '신고를 해도 잡을 수 있을까'라며 불안감을 얘기한다"며 "국가가 그동안 피해자 보호를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지키고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시민들이 직접 나설 때까지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비판받아야 하고 또 이제라도 안전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엄중히 듣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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