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놓고 여성계·종교계 줄다리기…정부·국회는 눈치만
[1㎝ 약 삼킨 여자들]⑦3년 넘도록 '입법 공백'…'임신중절' 사회적 합의 가능할까
여성계·종교계 인식 차 여전…'현실 고민' 여성 신자에 어떻게 교리 적용해야 할까
- 홍유진 기자, 서상혁 기자, 장성희 기자, 김예원 기자
(서울=뉴스1) 홍유진 서상혁 장성희 김예원 기자 =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죄가 효력을 잃은 지 5년이 지났지만 후속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국회와 정부가 새로운 법안을 논의할 때마다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혀 임신 중지는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 이후 임신 중지 시스템이 보건·의료계에 안착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하는 셈이다.
관건은 임신 중지를 놓고 종교계와 여성계가 인식 차이를 좁힐지이다. '태아를 생명으로 인식'해 임신 중단에 반발하는 기독교계는 임신·출산권을 여성의 자기 결정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여성계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신자 수는 2022년 기준 총 1031만 8532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태아 생명권이냐 여성 자기 결정권이냐…해묵은 논쟁 여전
헌법 재판소는 지난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국회에 주문했다. 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개정 시한이 3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보완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관련 법과 제도는 공전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종교계와 여성계의 눈치를 본 탓이다. 21대 국회에서는 6개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모두 임기 종료로 폐기됐다.
특히 종교계는 임신 중지 제도화를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다. 일부 종교 단체는 임신 중지를 신념에 반하는 행위라며 반대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한 천주교 관계자는 "교리상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인격적인 존재로 바라본다"며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임신 중절 행위를 살인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신 출산권을 '헌법 제10조 자기 결정권'의 하나로 보장해 여성 인권이나 기본권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여성 단체의 입장과 정반대인 셈이다.
다만 한국 사회 성인들은 대체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팀이 지난 3월 8~11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시돼야 한다는 응답자 비율은 54%였다. 반면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사람은 35%로 19%포인트(p) 낮았다.
◇'헌법불합치' 전 헌법재판관 "기독교 단체 눈치 보는 국회"
그럼에도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강한 반발에 부딪혀 입법 논의는 번번이 실패해 왔다. 21대 국회 당시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2020년 임신 주수·사유 제한 없이 임신 중지를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듬해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임신 중지 보험급여를 실시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내놨다.
하지만 종교단체인 한국교회총연합·목산침례교회·생명사랑국민연합 등이 해당 개정안에 거세게 반대하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종교단체들은 '14주 이내 임신 중지 허용'을 골자로 한 정부안에도 "12주 이내 95%의 낙태가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실상 낙태를 허용하는 것과 다름없다"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낙태죄 처벌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 의견을 낸 전직 헌법재판관은 <뉴스1>과의 통화에서 "기독교 단체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국회에서 눈치를 보느라 입법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며 "헌재에서 제시한 기준대로 입법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먹는 임신 중절 약인 '미프진'의 도입이 미뤄지는 배경에도 종교계의 반발 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서울대교구생명위원회 등 종교계 시민단체가 연대해 만든 '행동하는 프로라이프'는 "미프진은 엄청난 출혈과 통증을 유발하고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와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프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2005년부터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약물이다. 전 세계 95개국에서 쓰이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식약처의 품목허가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SNS와 불법 사이트 등 음지에서 거래가 은밀하게 이뤄지는 이유다.
◇여성 신자도 임신 중지 경험…"선악 이분법 프레임 벗어나야"
다만 종교계 일각에서 임신 중지 시스템을 보건의료 제도 내로 들여와야 한다는 의견도 고개를 든다. 비록 소수의견이지만 앞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지점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교수의 '여성주의 기독교윤리학의 재생산권 변증' 논문을 보면, "낙태를 둘러싼 선과 악의 이원법적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며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에 내몰리는 여성들을 사회적 편견과 법적 처벌에서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기독교 신자 중에서도 이미 많은 여성이 임신 중지를 경험하고 있다"며 "현실적인 고민을 여성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교리를 정의롭게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cym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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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에서 임신 중지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과연 그럴까. 의료계는 여전히 임신 중지 수술에 소극적이며, 일부는 진료조차 거부한다. 각자도생에 내몰린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정체불명의 판매자를 만나 임신 중지 약물 '미프진'을 구매한다. 가짜 약인지, 진짜 약인지 확인이 어렵지만 지름 1㎝의 알약을 입안에 털어 꾸역꾸역 삼킨다. 정부와 국회는 뒷짐 진 채 여성들의 '목숨 건 임신 중단'을 관망 중이다. 뉴스1은 지난 2개월간 전국 산부인과 300여 곳을 전수 조사하고, 전국 곳곳에 있는 미프진 판매자들과 구매자 여성들을 직접 만나 대한민국 임신 중지 실태를 심층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