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속옷만 널려 있는 집 침입, 21명 성폭행한 대구 발바리
주로 새벽 3~5시 침입, 얼굴에 수건 씌우고 샤워 강요[사건속 오늘]
5년간 휘저었지만 오리무중…절도사건으로 체포, DNA 검사 끝 입증
- 박태훈 선임기자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2000년대 초중반 대구시 수성구와 남구 일대 원룸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한여름에도 마음껏 창문을 열어놓지 못했다.
대구 발바리가 언제 덮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대프리카 밤의 열기를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5년 11월 5일 대구고법 제1형사부 재판장인 이범균 부장판사는 특수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된 대구 발바리 김 모 씨(1969년)에 대해 "피고인을 마땅히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키는 중형에 처해야 할 사정이 있음은 충분히 인정된다"며 검찰의 사형 구형이 과도한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다만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원히 박탈하는 사형은 문명국가의 이성적인 사법제도가 상정할 수 있는 극히 예외적인 형벌이라는 점을 고려했다"며 1심과 같이 무기징역형과 함께 10년간 신상정보 공개를 명령했다.
무기징역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김은 2002년 1월부터 2007년 1월까지 5년간 대구 수성구와 남구 일대 원룸, 발리에 20차례 침입해 여성 21명을 성폭행하고 1200여만 원의 금품을 빼앗았다.
20차례 중에는 한 방에서 2명의 여성을 번갈아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김은 철저하게 여성 혼자 있는 집만 노렸다.
범행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수성구와 남구 원룸 빌라 등을 돌아다니면서 빨랫줄을 유심히 살폈다. 빨랫줄에 남성 옷이나 빨래가 많이 걸려 있는 집을 빼고 '여성 속옷만 널려 있는 집'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김은 범행할 원룸 주변을 철저하게 살핀 뒤 새벽 3~5시 무렵 침입했다. 이 시간대가 피해자들이 가장 깊숙하게 잠들어 침입해도 잘 모르기 때문.
혹시나 얼굴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김은 마스크와 여성용 스타킹을 써 피해자가 자기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주로 가스 배관을 타고 피해자 집까지 올라간 뒤 열린 창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 얼굴에 스타킹을 썼음에도 안심하지 못한 듯 피해자 얼굴을 수건 혹은 이불로 가린 뒤 성폭행했다.
범행 후 강제로 샤워 등을 시켜 증거물을 없앴다.
또 휴지 등까지 챙겨 나가는 등 DNA가 남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김은 나름 용의주도하게 얼굴도 숨겼고 체액 등 DNA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피해자 옷과 신체 등에 무심코 남긴 침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폭행 피해 사실을 접수한 경찰은 피해자의 옷과 신체 등에 남긴 김의 미세한 침방울을 찾아내 DNA를 추출했다. 이를 동종 전과자 등의 DNA와 비교했으나 일치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일로 김을 잡게 됐다.
경찰은 대구 발바리를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대구 발바리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수성구, 남구 주민들 사이에 퍼졌고 창문을 걸어 잠그는 집들이 늘어났다.
여기에 꼬리가 길면 밟힐 것을 우려한 김이 2007년 1월 마지막 성폭행 범죄 뒤 행동을 멈추는 바람에 경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9일 김이 수성구의 한 가정집에 침입, 절도를 하다가 들켜 가족들과 격투를 벌였다.
흉기를 든 김에 가족들은 야구 방망이 등을 동원해 맞서는 한편 112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김을 체포한 뒤 여죄를 캐는 한편 DNA 검사를 했다.
그 결과 경찰이 해결 과제로 남겨 놓았던 대구 발바리가 김임이 드러났다.
피해 여성들은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 피해를 당한 여성은 쉬쉬했지만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남편이 사실을 알게 돼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또 한 여성은 "날씨가 더워도 창문을 열어놓고 자지 못하고 외출할 때면 주머니칼을 넣고 다닌다", 또다른 여성은 "대인기피증이 생겨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buckba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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