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엔 현장에서 본 '한국어 교가'를 향한 시선[기자의눈]
"일본 문화에 대한 모욕" vs "전혀 상관 없다" 온라인과 현장 온도차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시엔에 한국어 교가가 흐르는 게 정말 싫다. 일본 문화에 대한 모욕이다."
"일본 대회에선 일본어를 써야 하고 그게 싫으면 한국 대회에 나가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일본 고교 야구 '꿈의 무대'로 불리는 '고시엔' 결승전에서 우승하자 일본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이런 반응이 올라왔다.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가 NHK를 통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경기 당일 효고현 고시엔 경기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확성기를 들고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쏟아내는 극우 단체도, 혐한 팻말도 없었다. 소위 말하는 '얘기되는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붉은색 교토국제고 응원기를 펼쳐 든 관중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취재는 첫 질문부터 막혔다. '고시엔 100주년 결승전에 대한 소감', '응원하는 팀' 등 가벼운 질문을 쌓고 본래 목적인 '재일동포 학교의 결승전 진출',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지는 것'에 대한 질문을 찔러넣었다.
돌아온 대답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이었다. 첫 취재 대상이었던 20대 일본 여성은 상대편인 도쿄 다이이치고를 응원했다. 그러나 '한국계 민족학교', '한국어 교가'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K팝 등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관중석을 오가며 취재를 지속했다. 한 30대 초반 남성은 "재일동포 학교라든지 한국어 교가 같은 거는 팀을 응원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걸 왜 묻느냐는 표정과 함께.
그는 세대 차이를 말했다. "쇼와 시대(1926~1989년) 사람들만 시끄러운 거 같다. 세대가 달라졌고, 힘내서 뛰는 선수를 응원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본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했던 이승엽을 좋아했다며 자신이 아는 한국 선수를 늘어놓았다.
세대를 달리해도 반응은 비슷했다. 70대도, 80대도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에 재일동포 학교의 한국어 교가가 불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한국계 민족학교의 대단한 승리였다"고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혐한은 실존한다. '한국어 교가'와 '동해' 표기를 트집 잡아 교토국제고의 성취를 지우려 하는 극우 세력은 여전히 일본 사회 내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부 혐오 발화가 실제 여론과 일치하는지 여부다.
한국어 교가를 향한 혐한의 목소리는 온라인을 경유해 확대 재생산됐다. 이 같은 혐한 여론이 집중 조명되면서 국내에서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반면,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 고시엔 현장에서 이 같은 발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같은 온도 차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 지금의 한일 관계, 나아가 나와 너, 우리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데 필요하다. 타깃이 명확하지 않은 비판은 오히려 혐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연장 접전 끝에 승부가 나기 전까지 2시간 내내 취재했지만, 미리 그려 놓은 밑그림에 맞는 '멘트'는 얻을 수 없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냐", "전혀 관계 없다"는 식의 반응들이 기자의 질문을 부끄럽게 했다.
Ktiger@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