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낙태'로 드러난 입법 공백…“신자들도 법·시스템 필요"

'낙태 동영상' 시스템 부재 단면…5년 넘게 '임신 중지' 빈칸
종교계 반대 의식 모자보건법 개정 지지부진…"복지부 나서야"

2022년 4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1년 4.10공동행동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될 때까지'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서울=뉴스1) 남해인 조유리 기자 = "천주교 신자지만 임신 중지에 관한 규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생명을 죽일 순 없지만…아이를 낳았을 때는 서로가 비극이니"

종교계의 반대로 임신 중지(낙태)에 관한 법률이 5년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서도 법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최근 '36주 낙태' 영상이 공개되면서 '입법 공백'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정부와 국회가 더이상 미루지 말고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3일 조계사와 명동성당,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임신 중지에 관해 엇갈린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낙태죄'가 폐지된 이상 임신 중지에 관한 법과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황 모 씨(42)는 "임신 중지를 하는 게 아이와 부모를 위해서, 부모의 남은 삶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한다"며 "생명 존중에 차원에서 조심스럽지만 임신 주수 등에 관해서 입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천주교 신자라고 밝힌 A 씨는 "임신 중지에 반대하지만 절대 진리는 없으니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며 "36주는 너무 태어나기 전이라 살인이라 생각하고 (허용하는 임신) 주수는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시대는 바뀌는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동성당에서 만난 20대 여성 천주교 신자 신 모 씨는 "천주교 신자지만 현재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임신 중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낙태죄만 없어졌고 안전하게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법이 없으니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조계사에서 만난 60대 여성 불교 신자 B 씨는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면서도 "아이를 낳았을 때는 서로가 비극이니 결국 임신 중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 '36주 낙태' 살인죄 적용 논란…빈칸이었던 '임신 중지'

최근 임신 36주 차에 임신 중지('낙태') 수술을 받았다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임신 36주차에 임신 중지를 한 경험담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20대 여성 A 씨와 수술한 병원장을 특정해 살인 혐의 피의자로 입건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지난 12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전문적인 의료 감정 등을 거쳐 태아가 몇주였는지, 낙태인지, 살인인지, 사산인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A 씨와 그를 수술한 의사에 대해 살인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모자보건법상 임신 24주를 넘어가는 낙태는 불법이지만 형법상 낙태죄가 사라지면서 처벌 효력이 없어진 점을 고려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5년이 지나도록 보완 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36주 낙태'는 입법 공백에 따른 의료 시스템 부재의 단면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천세관이 압수한 중국산 낙태약. 인천세관은 중국산 낙태약을 미국산으로 속여 판매해온 일당 6명을 적발했다. 가짜 낙태약은 임산부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인천세관 제공)/뉴스1 ⓒ News1 정진욱 기자

◇ 종교 단체 반대에 국회도 소극적…"가이드 마련해야"

정부와 국회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입법 반대 여론을 의식해 여전히 눈치만 살피고 있다. 개정 법률안이 국회에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권인숙 전 의원은 지난 2020년 임신 중지 주수 허용 한계를 삭제하고 보호 시스템을 만드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듬해 남인순 의원은 임신 중지에 대한 보험급여를 실시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내놨다. 이에 대해 종교 단체인 한국교회총연합, 목산침례교회 등은 "12주 이내 95% 낙태가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실상 낙태를 허용하는 것임으로 반대"라는 입장을 밝혔다.

시민단체들은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해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마무리하고 의료 시스템과 관련 법 정비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민단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는 지난 13일 성명서를 내고 "('36주 낙태'를 살인 혐의로 수사 의뢰한)정부는 어떻게든 여성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문제"라며 "지금 우리 사회가 질문해야 할 것은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왜 이처럼 늦은 시기에 임신 중지가 진행됐는지, 임신 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여성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건복지부는 임신 기간 당사자의 상황,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른 명확한 보건의료 지침과 가이드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hi_na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