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빚 20대, 아내와 짜고 건물주 엄마·연구원 친형 살해

시신 훼손후 유기, 태연하게 실종 신고[사건속 오늘]
아내 피의자 전환되자 "억울하다" 유서 남기고 사망

(MBC 뉴스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13년 8월 13일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 거주하는 50대 여성과 30대 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50대 여성은 6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8가구가 사는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의 건물주였다. 감쪽같이 사라진 모자는 실종 신고 한 달 뒤 정선군과 울진군에서 각각 시신으로 발견됐다.

모자가 주검으로 발견되기 전인 8월 16일 차남 정 모 씨는 지구대를 찾아 "어머니가 사흘째 돌아오지 않는다"며 실종신고를 했다.

신고 당시 정 씨는 13일 오전 9시쯤 자신이 집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온 형에게 물었을 땐 어머니가 아침에 등산을 갔다고 얘기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와 형 연이어 실종…차남은 이틀간 수면제 먹고 잠만 자

경찰은 13일 오전 정 씨의 어머니가 은행 ATM 기기에서 현금 20만 원을 출금하는 장면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집에서 다시 나오는 모습은 어디서도 포착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라진 다음 날 정 씨의 형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5년여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재계약을 2주 남긴 시점부터 출근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어머니 집 앞에 주차돼 있던 정 씨 형의 차를 수색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까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어머니의 집에서 100m 떨어진 주유소 CCTV에서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 어머니와 아들이 사라진 다음 날인 14일 오후 2시 47분 큰아들 차가 집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확인된 것. 인천에서 출발한 차는 새벽 2시쯤 경북 봉화를 들러 새벽 3시 22분 정선으로 갔다가 인천으로 돌아왔다. 12시간 동안 이동 거리만 약 730㎞에 달했다.

◇'봉화·정선' 찍고 인천 돌아온 형 차…모자 눌러쓴 운전자는 차남

CCTV 확인 결과 운전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누군지 식별이 전혀 안 되는 상태였다. 경찰은 동해 요금소에서 운전자가 지불한 현금과 통행증을 확보해 분석을 의뢰했다.

놀랍게도 지문의 주인은 실종신고를 한 차남 정 씨였다. 정 씨 부부는 결혼 당시 어머니가 해준 집을 담보로 잡고 도박을 하다 8000만 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있었다. 신용불량자였던 정 씨는 건물주였던 어머니에게 자주 돈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어머니는 현관 비밀번호까지 바꾼 상태였다.

정 씨 어머니는 주변 지인들에게 "둘째가 자꾸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한다. 막무가내로 달라고 하니까 힘들다. 며칠 전에는 비가 왔는데 혼자 있으니까 무섭더라. 걔는 눈이 돌면 나를 어떻게 할 수도 있어. 죽일 수도 있다니까"라며 불안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E채널 '용감한형사들2' 갈무리)

더욱 이상한 건 정 씨의 행동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13, 14일 이틀간 수면제를 먹고 계속해서 잠만 잤던 것으로 확인됐다.

◇실종 열흘 만에 존속살해 혐의로 체포된 차남, ‘증거불충분’ 석방

경찰은 형 주변인들을 탐문했지만 잠적할 만한 이유는 없던 걸로 파악됐다. 또 정 씨는 어머니가 사라진 뒤 형도 자취를 감췄지만 실종 신고를 하지 않은 점에 의문을 가졌다.

정 씨가 형이 일을 저지르고 숨은 것처럼 보이게 해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한 경찰은 유력 용의자 정 씨를 모자 실종 열흘 만에 존속살해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정 씨는 "어머니와 형은 어디 있냐"는 형사의 물음에 "어머니는 죽었을 것 같고 형은 살아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경찰이 지문을 조작하고 강압적으로 수사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사건과 무관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결국 정 씨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경찰은 정 씨와 같은 유치장에 있던 수감자로부터 결정적인 제보를 듣게 된다. 수감자는 "(정 씨에게) 어떻게 들어왔냐고 했더니 대뜸 난 재판받으면 사형일 거다"라고 말했다.

정 씨는 "우리나라에 사형받을 죄가 있냐"는 물음에 "너무 깊게 알려고 하지 마라. 사체도 없고 증거도 없고 혈흔도 없다"면서 풀려날 걸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정 씨 부부 집 한쪽엔 범죄 서적 가득…아내 "프로파일러가 꿈"

사건 담당 형사는 정 씨의 아내인 김 모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김 씨는 "당신들 때문에 내 남편이 살인자 소리를 듣는다"라며 억울해했다.

김 씨 설득에 성공한 형사는 부부의 집에서 김 씨를 대면할 수 있었다. 집 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쓰레기와 배달 음식 용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 벽에는 범죄 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범죄 전문가들의 이름을 꿰차고 있었던 아내는 프로파일러가 꿈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형사와 남편 정 씨와의 첫 만남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시어머니 얘기를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향해 마시는 감기약을 들이켰다. 그는 말문이 막힐 때마다 습관적으로 약을 찾았고, 3시간 동안 5병을 마셨다.

김 씨는 13일부터 26일까지 검색 내역, TV 시청 기록, 남편과의 대화 내용을 시간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E채널 '용감한형사들2' 갈무리)

◇통신 기록 디지털 포렌식 결과 정 씨 부부, 한 달 전부터 범행 모의

경찰은 김 씨가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부부의 통신 기록을 국과수에 디지털 포렌식을 의뢰했다. 그 결과 부부가 범행 한 달 전부터 모의한 정황이 포착됐다.

두 사람이 나눈 메시지에 따르면 정 씨가 "울진에서 사체를 태우면 어떨까. 태우려면 뭐가 필요하지? 우리 캠핑했을 때처럼"이라고 묻자 아내 김 씨는 "땅을 파서 밑에 자갈을 깔아야지. 불 번지면 안 되니까. 톡으로 이런 거 보내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다.

경찰은 인천을 빠져나가는 길목 CCTV를 전부 확인해 정 씨가 아내 김 씨를 차에 태우는 모습을 확보했다. 이후 김 씨가 보는 앞에서 정 씨를 체포했다.

그러자 김 씨는 경찰에 자기가 먼저 조사받겠다고 했다. 담당 형사는 "나는 당신 말을 다 믿는다. 기억나는 거 없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차에서 자다가 잠깐 깼는데 남편이 차를 세우더니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숲속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약도를 그려보라고 하자 태백 국도를 타고 가다가 정선으로 들어서는데 골목길에 옥수수 자판이 보이더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전하며 그림을 그렸다. 형사가 "여기 가면 사체가 있느냐"고 묻자 직접 찾아주겠다고 했다.

◇정 씨, 형과 공범 주장…아내 피의자 전환되자 유서 남기고 사망

형사는 아내와 함께 정선으로 향했다. 아내가 가리킨 곳은 잣나무밭이 있는 얕은 언덕이었다. 아내와 형사 몇 명은 산 아래에서 대기 중이었고 수색팀은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산하던 중 한 형사가 아내가 짚은 곳의 반대쪽으로 홀린 듯 향했다. 산 반대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담요를 들춰보니 어머니의 시신이 있었다. 발견된 시신은 손가락 끝이 전부 훼손돼 있고, 아래턱이 함몰되고 치아는 다 부서진 상태였다.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시신을 찾았다는 소리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후 형사는 정 씨를 찾아가 형 시신의 행방을 물었다. 정 씨는 형과 공범이었다고 주장하며 범죄를 축소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형사의 압박 수사에 결국 시신 유기 장소를 실토했다.

울진의 한 계곡 근처에서 발견된 시신은 훼손된 채 불탄 상태였다. 정 씨는 시신 훼손한 이유에 대해 "무거워서"라고 답했다.

참고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던 아내 김 씨는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자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심 재판부는 정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피해자 친지들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 씨는 현재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ro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