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 나와 비교돼"…옥탑방 침입 '두 자녀 아빠' 살해

"나는 비참한데"…이웃 웃음소리 들리자 욱하며 범행[사건속 오늘]
어릴 적 아버지 극심한 가정폭력 그대로 학습…"행복하고 싶었다"

(tvN '알쓸범잡2'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07년 8월 7일 평온한 주말 오후 6시 5분,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다가구주택 3층 옥탑방에 살던 화목한 일가족에게 불행이 들이닥쳤다. 열린 창문 틈으로 흘러나온 가족의 웃음소리는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거실에는 주부 장 모 씨와 딸(14), 아들(11)이 TV를 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는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 놀란 장 씨가 앞을 막자 남성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둔기로 장 씨의 머리를 가격했다.

비명을 듣고 남편 임 모 씨가 거실로 나왔다. 담배를 물고 있던 남성은 담배와 둔기를 떨어뜨린 후 가방에서 날 흉기를 꺼내 임 씨의 옆구리를 두 차례 찌르고 도주했다. 장 씨는 두부 골절상에 그쳤지만 임 씨는 후송 중에 사망했다.

◇현장 인근 34개 CCTV서 범인 포착…발생 6일 만에 공개수사 전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 남은 증거들을 수집했다. 현장에는 쪽지문 10여 점과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낙하 혈흔, 담배꽁초, 떨어뜨리고 간 모자, 둔기 등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감정을 의뢰했다. 당시 유전자은행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지만,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여서 범인의 것과 일치하는 DNA 대조군이 없었다.

범행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한 아이들은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아 점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날의 끔찍한 기억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아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에 나섰다. 사건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 지인, 주민들을 탐문했으나 부부와 갈등을 빚거나 원한 관계에 있는 이는 없었다.

경찰은 현장 인근의 방범용 CCTV 900여 대를 입수했고 이 중 34군데 CCTV에서 범인의 모습을 확보했다. 동시에 5개 형사팀의 27명 전원을 투입해 탐문을 실시했다.

(tvN '알쓸범잡2' 갈무리)

CCTV 확인 결과 범인은 전날부터 양천구 일대를 배회했다. 범행 이후 그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거리를 돌아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키 170㎝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범인은 검은색 운동복 상하의와 회색 배낭을 메고 빨간 줄이 그어진 검은색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전후로 추정됐다.

경찰은 긴급 통신사실 조회 신청을 했고, CCTV에 포착된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전화 통화를 한 이력이 있는 2만 5000명을 일일이 다 확인했다. 하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사건 6일 만에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전국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이후 언론 매체, 길거리 게시판 등에 CCTV 장면이 게시됐고 수배 전단 2만 8000장이 배포됐다.

아쉽게도 제보 내용은 오인이거나 허위 신고가 대부분이었다. 경찰은 추가 범죄를 막기 위해 현장 주변부터 인접 도시까지 4000세대를 직접 방문하는 등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범행 당일 12시간 배회하다 옥탑방 침입해 범행…36일 만에 검거

36일째 되던 날 한 형사는 양천구 일대를 돌아다니다 범인의 인상착의와 동일한 남성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가 "너 망치로 왜 때렸냐"고 물었다. 추궁을 받은 남성은 반항 없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경찰서 가서 얘기하시죠"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은 33세 윤 모 씨였다. 강도강간 등 혐의로 14년 6개월 동안 수감됐다가 범행 3개월 전 출소한 상태였다. 당시 윤 씨는 출소자들의 사회화를 돕는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에서 생활하며 일용직으로 일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당일에는 일거리가 없자 둔기, 흉기를 배낭에 챙겨 나와 양천구 일대를 12시간가량 배회했다. 오후 5시 45분부터는 신정동의 한 놀이터에 앉아 막걸리 한 병을 마셨고, 이때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건너편 주택에 침입해 범행을 저질렀다.

놀랍게도 윤 씨는 범행 때 입었던 옷을 계속 입고 돌아다녔다. TV도 보지 않고 컴퓨터도 없었기 때문에 본인이 수배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복지공단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해왔다. 심지어 피해자가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정폭력 시달리다 비뚤어져…19세 때 주부 성폭행 후 금품 갈취

경북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윤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극심한 가정폭력을 당하며 자랐던 것으로 파악됐다. 주사가 심했던 윤 씨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집안을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했다.

윤 씨는 아버지가 행패 부리는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학습했다. 이로 인해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아버지가 하던 행동을 똑같이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채널A 갈무리)

첫 범죄는 19세 무렵이었다. 알고 지내던 주변 형들과 가정집에 침입해 주부를 성폭행한 뒤 금품을 갈취했고, 이로 인해 교도소에 수감됐다.

윤 씨는 자신이 복역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가족을 더욱 원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윤 씨는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과 나 너무 비교"…재판부, 무기징역 선고

9월 14일 오전 10시 현장 검증이 실시됐다. 맨발에 슬리퍼, 청바지, 형광색 점퍼를 입고 등장한 윤 씨는 "나 자신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저와 비교돼서 순간적으로"라고 답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 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죄송하다. 내가 죽어서라도 참회해야겠다"고 답했다.

윤 씨는 범행 이유에 대해 "나는 세상을 어렵게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웃음꽃이 피는 행복한 가정이 싫어 웃음소리가 나서 사람을 죽였다"라고 했다.

그는 옥탑방에서 일가족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욱하는 마음에 망치를 꺼내 범행했고, 칼은 과일을 깎아 먹으려고 배낭에 넣어 다녔다고 주장했다.

윤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살인 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별다른 이유가 없는 무작위 살인으로 인한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선고 이유를 전했다. 윤 씨는 항소했지만, 기각되면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법무부에서는 피해자 가족에게 임대 주택을 시세의 30% 금액에 제공하고 유족보조금으로 3000만 원을 지급해 피해자 가족의 이사를 도왔다.

ro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