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도 에너지 낭비…차라리 반짝이는 아이돌이 낫다"[팬덤 보고서]②

양방향·실시간 소통 가능해진 팬 활동…2030 지갑 왜 여나
"갈등·스트레스 많은 2030…열광·설렘 감정, 연애→팬덤"

편집자주 ...대중문화 팬덤이 '10대의 고유문화'라는 것은 옛말이다. 내년 서른 살이 되는 직장인 여성은 자신보다 어린 아이돌 그룹 사인회의 입장권을 얻고자 앨범을 200만 원어치 산다. 가수 임영웅의 팬덤은 주로 중장년층으로 소문난 '고액 기부자'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열광하게 하고, 지갑을 열게 했을까. 한때 자신도 팬덤에 속했다는 남해인 기자가 사회 현상으로 주목받는 팬덤의 세계를 심층적으로 해부해 보도한다.

지난 4월 22일 인천공항 제2터미널이 출국하는 한 아이돌 그룹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로 가득차 있다. /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서울=뉴스1) 남해인 기자 = 직장인 이 모 씨(29)는 자신을 '케이팝(K-POP) 고인물'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의 팬이다. 이 씨는 카리나 팬덤 활동이 "사회생활로부터의 도피처"라고 힘줘 말했다.

이 씨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서 경직된 태도로 일한다고 털어놨다. "사회생활을 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주눅도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응원하는 가수의 활동을 보면 잠시나마 웃고 힘이 솟는다. 그는 카리나를 "반짝거리고 친절한 내 가수"라고 표현했다.

◇아이돌 팬덤 큰손으로 떠오른 2030

이 씨는 최근 에스파의 앨범 '드라마'에 수록된 포토 카드를 종류별로 모으기 위해 50만 원가량을 지출했다. 팬덤 아닌 성인이라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는 "어차피 지민이(가수 카리나의 본명)는 더 큰 행복을 주니 후회하지 않는다"며 "굳이 말하자면 일방향적 사랑이지만, 가수와 팬 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지니 때론 양방향이라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빅뱅·동방신기·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이 등장했던 2000년대 후반만 해도 2030세대 직장인의 아이돌 팬덤 진입은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아이돌 팬덤은 10대들만의 문화였다. 아이돌 콘텐츠도 음악 방송과 예능 등 TV프로그램에서 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플랫폼이 다변화면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아이돌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심지어 콘서트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아이돌 콘텐츠의 진입 장벽이 낮아졌고 이 씨 같은 2030 직장인들도 속속 '내 가수'에 빠져든 것이다. 이른바 '덕질'은 2030 직장인의 일상 속 위안으로 자리잡았고 이들은 아이돌 팬덤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2030 직장인이 10대 팬덤과 다른 것은 '구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영상 콘텐츠 제공과 굿즈(상품) 온라인 판매, 유료 팬클럽 가입 등 팬덤 활동의 집합체인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와 '버블'에서 운영하는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는 2030 팬덤에서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유료 서비스 중 하나다.

배우 변우석 '위버스 일대일 메시지'(DM·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화면 갈무리. ⓒ 뉴스1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는 구독자 모두에게 보내는 연예인의 메시지가 마치 개인 간 대화인 카카오톡 메시지처럼 화면에 뜨는 것이다. 자신이 흠모하는 연예인이 "나 오늘 점메추(점심 메뉴 추천) 해줘" "오늘 내가 운동하는 영상 보여줄게"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팬은 이에 답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식이다. 재치 있는 메시지를 보낸 팬의 이름을 연예인이 언급할 때도 있다.

배우 변우석 팬 활동을 하는 직장인 오 모 씨(31)는 "직장에서 시달리고 나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지치는데, 덕질은 내가 관계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설렘을 느끼고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취미 활동"이라고 말했다.

변우석의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위버스 일대일 메시지(DM)'를 구독 중인 오 씨는 변우석의 메시지 알림이 뜬 휴대폰 화면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그룹 데이식스 팬 활동을 하며 프라이빗 메시지 '버블'을 구독하는 직장인 윤 모 씨(29)는 "직장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사이 휴대폰에 와있는 데이식스의 버블(메시지)을 보는 게 삶의 낙"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잠깐 짬 내서 답장도 보내고, 내가 보낸 답장의 '1'이 사라지면 정말 소통하고 있는 것이 실감한다"고 말했다. 윤 씨는 콘서트장에서 처음 만난 팬들과 함께 '떡메'(떡메모지) '도무송'(스티커) 등 굿즈도 자체 제작할 만큼 팬덤에 진심이고 열성적이다.

◇'감정 낭비 없는 간편한 사랑' 원하는 이유

전문가들은 감정 소모를 피하면서 설렘과 열광의 감정을 느끼려는 취미 활동이 '2030 직장인의 팬덤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감정 낭비 없는 간편한 사랑'을 추구하는 셈이다. 경직되고 경쟁적인 사회 활동에 지친 2030 직장인에게 '덕질'은 해방구로도 인식되고 있다.

에스파 지젤(왼쪽부터)꽈 윈터, 카리나, 닝닝이 해외 일정을 위해 2일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인사를 하고 있다. 2024.7.2/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030은 상대에게 거절당하면 부담스러워 연애를 열정적으로 하지 않고, '썸' 타는 것도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연애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것도 비슷한 원리"라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누군가에게 열광하는 마음, 이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본능인데 이런 마음이 팬 활동으로 옮겨간 것"이라며 "이런 마음은 이성에게 국한된 게 아니라 우상화하고 롤모델로 삼고 싶은 동성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감정 소모는 없으면서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의 행위는 할 수 있는 데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며 "10대 때는 구매력이 없어 맹목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매력이 생기면서 다양한 팬덤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hi_na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