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집 다녀간 엄마, 풀밭서 변사체로…33년만에 밝힌 '살인의 추억'

이춘재 연쇄 살인, 수사 대상만 2만1280명[사건속 오늘]
살인 10건 모두 공소시효 넘겨…윤성여씨 억울한 옥살이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 News1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86아시안게임 개막을 5일 앞둔 1986년 9월 15일, 딸 집을 찾았던 70대 친정어머니 A 씨는 미뤄 둔 농사일이 걱정된다며 딸 집을 나선 뒤 행방이 묘연했다.

A 씨는 행불 4일 뒤인 19일 오후 2시 경기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 씨 이후 1991년 4월 3일 수원의 딸 집에 갔다고 집으로 돌아가던 60대 여성 B 씨가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피살되는 등 화성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5명의 초등생이 행방불명됐던 '대구 개구리 소년'과 함께 대한민국 최대 미제사건으로 불렸다.

'개구리 소년'과 달리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2019년 9월 18일 진범으로 이춘재(1963년생)가 특정돼 미제사건 목록에서 빠졌으며 이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름을 달리하게 됐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2019년 10월 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 이춘재 관련 질의를 받고 있다. 2019.10.4/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 이춘재 화성에서만 11명 살해, 17명 성폭행…공소시효 지나 처벌 불가

이춘재는 1986년부터 1994년 1월까지 모두 15명을 살해하고 21명을 성폭행(14명 피살자 중 13명 성폭행)했다.

이중 경기도 화성에서만 11명을 죽였고 17명을 성폭행했다.

그로 인해 연인원 205만 명이나 되는 경찰이 동원됐고 수사대상자 2만 1280명, 지문을 대조 당한 사람도 4만 116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경찰력을 낭비한 사건이었지만 진범을 잡고도 처벌하지 못했다.

그가 진범임으로 밝혀진 2019년 9월엔 10차 화성 살해 사건(1991년 4월 3일)은 물론이고 1992년 6월 청주 가정주부 성폭행 살해건 모두 살인 공소시효 15년(2007년 12월 21일 25년으로 늘어남→ 2015년 7월 24일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복역 후 출소한 윤성여씨가 2020년 11월 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던 중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날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는 34년 만에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2020.11.2/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 1차 살인, 진범 잡힌 뒤 9월 14일로 날짜 변경…무고한 시민이 범인으로 옥살이

이춘재 연쇄살인 1차 사건 날짜는 그가 진범으로 밝혀진 뒤 "9월 14일 밤 9시쯤 살해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9월 15일 아침 6시 20분 피살된 것으로 추정'에서 '9월 14일 밤 9시~10시 사이 피살'로 변경됐다.

이춘재 살인사건은 2003년 4월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으로 만들어 다시 한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가 개봉됐을 무렵엔 1987년 1월 10일의 5차 사건 공소시효가 완성된 시점이며 마지막 10차 살인사건(1991년 4월 3일) 공소시효 만료도 3년밖에 남겨놓지 않았다.

200만 명이 넘는 경찰력을 동원하고도 범인 냄새조차 맡지 못했던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엮어 무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1988년 9월 16일 아침 화성군 태안읍 진만리 가정집에서 C 양(당시 14세)이 숨진 채 발견되자 경찰은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모에서 정상치의 300배나 되는 티타늄 성분이 검출된 것을 토대로 기계 관련 종사자를 대상으로 수사를 펼쳤다.

수사 개시 10개월여가 흐른 1989년 7월 25일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윤성여 씨(당시 22세)를 체포, 압박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

1990년 무기징역형을 확정받은 윤성여 씨는 20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2009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춘재가 '윤 씨가 아니라 내가 죽였다'고 자백, 윤성여 씨는 재심 끝에 2020년 12월 17일 무죄 선고를 받았고 형사보상금 25억 1000만 원, 국가배상금 18억 7000만 원 받아 들었지만 청춘이 모두 지나간 뒤였다.

◇ 미제 사건 해결 열쇠는 DNA…과학수사 발전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은 이춘재'라고 지목한 건 DNA.

2019년 7월 15일 경찰은 화성사건 6차(1987년 1월 10일), 7차(1988년 9월 7일), 9차(1990년 11월 15일) 사건 때 확보한 DNA를 국과수에 보내 동일인이 있는지 의뢰했다.

그 결과 1994년 1월 13일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이춘재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고 형사대를 파견, 자백을 받아냈다.

이후 경찰은 2019년 12월 17일 사건 명칭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변경했으며 2020년 7월 관련 사건 수사를 마무리했다.

이춘재는 15건의 살인 중 14건에 대해 처벌받지 않았지만 살아서 걸어 나갈 생각을 단념해, 부산 교도소에서 옥살이 중이다.

buckba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