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112 전화, "으으으" 신음만…새벽 1시 발견된 고교생 시신

동급생 범인 의심, 물증 못찾고 자백 강요…영구 미제[사건속 오늘]
"엄마가 범인 끝까지 찾고 있다는 말, 아들에게 전하고 싶다" 호소

2005년 9월 6일 밤 살해당한 고교생 어머니는 아들에게 "엄마가 끝까지 범인을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SBS 갈무리) ⓒ 뉴스1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사건속 오늘' 이야기는 이제는 피해자 나이보다 더 오래된 19년 전 일어난 일로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미제 사건이 된 가슴 아픈 사건이다.

2005년 9월 6일 밤 11시 50분쯤 112 당직자가 걸려 온 신고 전화를 받았지만 "으으으" 하는 신음만 들려왔다.

112 당직자는 발신지가 서울 광진구 구의동임을 확인, 관할 지구대에 연락해 신고자를 찾도록 했지만 실패했다.

1시간여가 지난 9월 7일 새벽 1시쯤 행인이 "언덕옆 화단에 사람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고 신고, 재차 출동한 경찰은 고교 1년생 H 군(16)을 발견했으나 이미 숨진 뒤였다.

◇ 사건 현장 주변서 버려진 흉기…피해자 신고 전화 음성 분석

H 군은 단 한 차례 찔렸지만 복부 대동맥이 파열돼 현장에서 즉사했다. 누군가 있는 힘껏 흉기를 깊숙하게 꽂아 넣은 것으로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의 전형처럼 보였다.

H 군 시신을 병원으로 옮긴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90m쯤 떨어진 곳에서 30㎝가량의 피 묻은 칼을 찾았다.

경찰은 40명으로 전담팀을 편성, 목격자를 찾는 한편 그때까지 드러난 2가지 단서인 112 신고 전화와 칼을 통해 범인 윤곽을 잡으려 했다.

신고 전화 녹음을 반복해 들은 경찰은 H 군이 "A A A"라며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판단해 H 군 친구 중 A가 있는지 확인에 나섰다.

고교생이 흉기에 찔린 채 숨진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언덕. (SBS 갈무리) ⓒ 뉴스1

◇ 당시 판독기술로 칼에서 지문, DNA 확보 실패…"H 군을 두 명이 쫓아가더라" 목격자

피 묻은 칼은 낚싯줄 등을 자를 때 사용하는 용도의 것으로 손잡이가 플라스틱 재질인 탓에 지문이 남지 않았다.

과학수사 기술이 몇 단계 발전한 지금이었다면 손잡이, 칼자루 등에서 범인의 윤곽(지문, DNA)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불가능했다.

한편 탐문 수사에 나선 경찰은 사건 현장 주변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그날 밤 두 명이 학생을 쫓아가는 것을 봤다. 얼마 뒤 두 명만 되돌아와 저쪽으로 가 버렸다"라는 말을 들었다.

경찰은 범인이 2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 피해자와 마지막까지 있었던 C "친구가 A 등과 사이가 나빴다"

이런 가운데 H 군이 숨지기 직전까지 놀았던 C 군은 경찰의 압박에 못 이겨 "H가 A, B와 사이가 나빴다"라는 말을 했다.

경찰은 112전화 음성에서 H 군이 "A A A"라고 한데다 C 군 진술 등을 종합해 9월 12일 같은 반 학생인 A, B 군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A 군은 "사건이 일어난 날 밤 10시 45분쯤 만화책을 반납하기 위해 만화방에 갔었다"고 했고 만화방 직원도 "A가 왔었다"고 했지만 H 군이 112신고를 한 시간과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알리바이는 묵살당했다.

음성분석 전문가는 112신고 전화속 소리는 사람 이름이기 보다는 신음소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고 판단했다. (SBS 갈무리) ⓒ 뉴스1

◇ A 군 "아버지 구속할까, 올림픽 5번 보면 나온다는 경찰 말에 '내가…'"

그날 밤 H 군과 엮인 점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던 A 군은 △ 칼은 청계천에서 구입했다 △ 평소 나를 괴롭혔던 H를 겁만 주려 했다 △ H가 대들어 찌르고 말았다 △ 그때 B는 뒤에서 오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은 B 군을 석방하는 한편 A 군을 살인 등의 혐의로 검찰로 넘겼다.

훗날 A 군은 법원 등에서 경찰이 "의자에 앉혀놓고 발로 차고 뺨을 때리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자백하지 않으면 부모님까지 위험해진다", "아버지도 구속될 수 있다", "네가 했다고 하면 끝난다", "올림픽을 4~5번 보고 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윽박질러 자백했다고 밝혔다.

◇ 1~3심 모두 무죄…강압에 의한 자백, 결정적 물증 없다

1심인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최규홍 부장판사)는 2006년 7월 27일 A 군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 군이 법정에서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는 점, 경찰조사 과정에서 조사관으로부터 뺨을 5~6대 맞는 등 강압적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는 점, B 군과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점, 범행도구에 A 군 지문 등이 없는 점 등 범행을 뒷받침할 물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무죄로 판단한 이유로 들었다.

검찰이 항소, 상고했으나 2심과 대법원 모두 1심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동급생 살해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2006년 7월 서울동부지법은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SBS 갈무리) ⓒ 뉴스1

◇ 112신고 속 "A A A" 음성…전문가 "이름 아닌 신음"

경찰이 A 군을 용의자로 특정하게 만든 112 신고속 "A A A"에 대해 음성전문가는 사람 이름이 아닌 신음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사건을 다룬 2020년 11월 28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사건 당시 음성을 분석한 장영재 씨는 "사람 이름으로 판단하기는 그렇다. 좀 부정확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15년 뒤 녹음 파일을 들은 녹취분석 전문가 이철형 씨는 "사람 이름이기보다는 고통에 의한 신음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고 했다.

이철형 씨는 경찰이 A 군으로 판단한 까닭에 대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들리게 되기 때문이다"고 해석했다.

고교생이 숨진 부근에서 흉기를 발견했지만 손잡이 부근이 오돌토돌해 2005년 당시 기술로는 지문채취가 불가능했다. 이 흉기는 대법원이 용의자로 기소된 동급생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 뒤 폐기됐다.(SBS 갈무리) ⓒ 뉴스1

◇ 어머니 "아이에게 엄마가 범인 끝까지 찾고 있다는 말 전하고 싶다"…증거물 칼, 폐기 돼

H 군의 어머니는 '그것이 알고싶다'와 인터뷰에서 "내 아이가 살해당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며 "아이에게 엄마가 (범인을) 끝까지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피맺힌 하소연을 했다.

112신고 녹취록과 함께 증거물로 제출됐던 피 묻은 칼은 대법원의 무죄 확정판결 뒤 폐기돼 범인 DNA를 찾을 길마저 끊겨 버렸다.

buckba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