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면 내인생 풀릴 줄"…'지능 상위 5%' 작가 지망생의 망상

울산 움막서 70대 살해…범행 도구·지문 한 점 없던 현장[사건속 오늘]
2년 지나 횡설수설 자백…증거 없어 영장 기각, 다른 사건 부검끝 해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12년 6월 19일 오후 5시쯤 울산 울주군 온양읍의 무도산 아래 움막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자는 움막에서 홀로 거주하던 70대 남성 김 모 씨였다.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간은 전날 밤부터 이날 아침 사이로, 사인은 다발성 손상 등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다. 누군가 머리와 얼굴을 여러 차례 둔기로 내리쳐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현장에서는 단 하나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범행 도구나 혈흔,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지문 한 점도 없었다. 출입문 난간에서 충격흔과 혈흔, 모발이 발견됐지만 피해자 것이었다.

마당에도 증거는 없었다. 사건 당일 밤 비가 많이 쏟아진 탓에 흔적이 모두 씻겨 내려간 상태였다. 가까운 마을과도 1㎞ 넘게 떨어져 있어 목격자도 없었다. CCTV도 없고 작은 단서조차 발견되지 않았기에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사건 2년 뒤 파출소 찾은 허 씨, 횡설수설하다 '살인' 고백

그로부터 2년이 지났을 무렵 한 중년 남성이 파출소 문을 두드렸다. 작가를 지망하던 40대 허 모 씨였다. 허 씨는 횡설수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놨다.

이때 남성은 "삶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마 제가 살인범이라 그런가 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같은 기간 해당 파출소로 발령받아 근무했던 박동일 울주경찰서 형사팀장은 허 씨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보기로 하고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그날부터 허 씨는 자주 전화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얘기했다. 박 형사의 노력 덕분인지 허 씨는 살인에 대해서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 형사는 허락을 받고 허 씨의 진술 내용을 모두 촬영하기로 했다. 자신을 살인 현장으로 안내했을 때의 모습도 고스란히 찍어뒀다.

허 씨는 폐허가 된 사건 현장을 가리키며 "여기 이 집이다. 이 집에 누가 살고 있었다. 그때는 밤이었다. 밤에 저를 보고 앞으로 오고 있었다. 오고 있는데 그때 결심하고 둔기로 쳤다"고 말했다.

박 형사가 "확실하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 야구방망이였나. 죽이고는 어떻게 했나"라고 묻자 허 씨는 "거짓말은 안 한다. 제가 그 시체를 방 안에 넣어놨다. 이불을 덮어놓고 왔다"고 답했다.

허 씨가 전한 당시 상황은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고, 실제 사건 상황과도 매우 같았다.

◇이웃 할머니 추가 살인 고백…"야구 배트로 머리 내리쳤다"

움막에서 돌아오는 길에 허 씨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박 형사에게 2년 전 본인이 살던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하며 "뒤에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제가 그 할머니를 그때 죽였었다"고 말했다. 움막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허 씨는 "제가 이전에 구입해 둔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들고 들어갔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었고 할머니 뒤쪽에서 야구 배트로 머리 부위를 내리쳤는데 넘어지는 것을 보고 저도 갑자기 겁이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고 진술했다.

박 형사는 동네에서 발생한 사건을 모두 뒤졌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아는 지인과 정보원들을 동원해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순찰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발품을 팔면서 수소문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3개월이 흘렀을 무렵 한 정보원으로부터 할머니가 입원 중이라는 결정적인 제보를 받았다.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족은 2년 전쯤 할머니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되찾지 못한다고 했다.

◇고강도 수사 끝에 허 씨에 체포영장…검찰, 증거불충분 기각

박 형사는 허 씨가 범인일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자백과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었다. 우선 허 씨가 범행 도구로 언급했던 야구 배트를 찾아 나섰다. 중장비를 동원해 사건 현장 인근 강바닥을 뒤집고, 허 씨의 옷 전부를 가지고 혈흔 반응 검사를 진행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허 씨는 지능 수준이 국내 상위 5% 정도로 뛰어나고 신춘문예에 작품을 제출할 정도로 글솜씨가 좋았다. 하지만 갑자기 정신질환이 찾아왔고 어느 날부터는 환청에 시달렸다. 그는 "움막에 사는 김 씨를 죽이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 될 거다"라는 말에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이나 허 씨의 지인들도 그가 범인일 리 없다고 했다. 허 씨 측은 사건 초기 증거 자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 경찰이 끼워맞추기 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허 씨가 다녔던 주유소 사장도 그를 성실한 직원으로 기억했다. "근무 태도나 이런 걸로 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A급 주유원이다"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찰은 허 씨를 소환해 강도 높은 심문을 벌였다. 허 씨는 "걸어서 갔다. 걸어서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때는 비가 안 왔다. 일을 저지를 때는 밤이었다. 아저씨를 때린 곳은 무허가 판잣집 앞뜰에서다. 아저씨를 때려 바닥에 쓰러지니까 후련한 생각이 들었고 아저씨를 죽인 다음 방안에 넣어두고 이불을 덮어 두었다.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보니까 비가 왔다. 확실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작성된 수사 기록과 현장 사진을 허 씨의 진술과 일일이 대조했다. 그 결과 모든 게 진술과 일치했다. 허 씨가 말한 날씨와 당일 해당 지역의 일기예보도 동일했다.

경찰은 허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기각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할머니 사망 원인 '두부 손상 후유증'…허 씨, 허위 자백 주장

수사가 지지부진해진 사이 박 형사는 지인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갔다가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알게 된 것.

박동일 형사는 유족들에게 부검을 설득했고, 사고 2년 만에 이루어졌다. 결과는 고도의 두부 손상 후유증이었다. 범행 도구는 야구 배트로 추정됐다.

집요한 수사 끝에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한 경찰은 2건의 살인 혐의 용의자로 허 씨를 지목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허 씨의 살인 자백 이후 1년 6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경찰을 스스로 찾아와 범행을 자백한 허 씨는 구속이 결정되자 입을 닫았다. 허 씨 측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 형사가 촬영한 100GB가 넘는 진술 영상과 부검 결과 등 여러 정황 증거들을 받아들여 허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심에 이어 대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영구 미제 될 뻔했는데…사건 담당 형사 "경찰이기에 했다"

자백하지 않았더라면 범행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갔을 허 씨는 "사람을 죽이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성공은커녕 자꾸 일이 꼬인다. 사건이 해결되면 혹시 자기 일이 다시 잘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허 씨에 대한 심리검사를 진행한 국과수 심리연구사는 "환청과 망상 증상이 공고화 되어 체계가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망상과 환청이 현실인지, 가상인지에 대해 구별을 못하는 상태였다"고 했다.

허 씨는 재판 후 치료감호소에 수감돼 몇 년간 치료를 받았다. 만약 허 씨의 자백을 지나쳤다면 두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억울함만 남긴 채 영구 미제로 남았을 터.

박 형사는 "형사가 범죄현장을 보고 지나친다는 거하고 똑같은 거다. 사건은 해결하지 않으면 멈춰지지 않는다. 늘 하는 얘기는 답은 딱 하나다. 경찰이기 때문에, 수사를 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한 거다"라고 말했다.

ro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