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발찌 이상 감지하고도 3시간 방치"…막을 수 있었던 성폭행 악몽

새해 첫날 성범죄 전과자가 또 성폭행…"왜 나는 보호받지 못했나"
국가배상소송 검토 "허술한 법으로 다른 피해자 없길"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모두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해 첫날을 보내던 1월 1일, A 씨(56·여)는 집에서 성폭행당했다. 처음 본 남자가 강남에서부터 자신을 뒤쫓아왔다고 했다. 11시간 근무를 마치고 막 퇴근해 피곤했던 A 씨는 남자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보고 그저 배달원이겠거니 짐작했다. 뒤따라 건물 안에 들어왔을 때도, 엘리베이터에 따라 탔을 때도 의심하지 못했다.

집에 들어와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기기까지 1~2초 사이, 문이 확 열리며 남자가 침입했다.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복도가 떠나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몸싸움 중 도어록이 망가지면서 남자 손에서는 피도 났다. 완력에 밀려 엎어진 A 씨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침착하게 대화로 달래야겠다고 마음먹은 A 씨는 남자에게 우동을 끓여주겠다, 같이 먹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무려 3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만 가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고, 걸려 오는 전화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몰랐어요. 전자발찌를 차고 있었다는 것을요. 나중에 수사관들이 말해줘서 알았죠. 거기서 더 무너져서 완전히 미칠 것 같더라고요."

지난 13일 뉴스1과 만난 A 씨는 국가가 원망스럽다며 한스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알고 보니 남자는 청소년 대상 성범죄 전과만 3회이고, 2016년 주거침입강간죄로 징역 8년 형을 받아 작년 8월에 출소한 김 모 씨(42)였다. 전자발찌를 차고 있던 성범죄 전과자를 상대로 무려 3시간을 끌었는데 그 어떤 경찰도 찾으러 오지 않았던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에서 김 씨 이름을 검색해 보니 강남구 일원동이 주소지로 떴다. A 씨가 사는 동네와 무려 4㎞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A 씨는 김 씨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던 이유가 경찰의 추적이 두려웠던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지난 3월 A 씨에게 보호관찰소 수사관들이 찾아왔다. A 씨는 수사관들에게 "당시 김 씨 휴대폰이 10차례 정도 계속 울렸지만, 김 씨가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사건 당시 보호관찰소도 이상을 감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집 근처에서 경찰 사이렌이라도 울렸으면 범행을 포기하고 도망가지 않았을까, 왜 나는 보호받지 못한 걸까.' A 씨 마음에는 의문이 들어찼다.

ⓒ News1 DB

그날 A 씨의 대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심하게 당하고 할래, 순순히 할래"라고 협박하는 김 씨 앞에서 A 씨는 무력했다. 키 180㎝가 넘는 거구는 왜소한 체격의 A 씨에게 공포나 다름없었다. 김 씨는 A 씨가 도망가거나 구조를 요청할 틈을 주지 않았고, 범행 뒤엔 A 씨에게 샤워를 종용하는 등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 한두 번 했던 솜씨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A 씨는 다른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날 김 씨가 들고 있던 봉지 안에는 누군가 신었던 흔적이 있는 검정 여자 스타킹이 있었다. A 씨는 "다른 여자한테 범행하려다 실패하고 나한테 온 것 같다"며 "그 스타킹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경찰에도 얘기했지만 잘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A 씨는 심한 불안 장애와 우울 장애를 얻어 심리 상담과 함께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약 처방 없이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은 음식물 쓰레기조차 버릴 엄두를 못 낼 만큼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대인기피증으로 일을 그만두면서 수입도 끊겼다. 몇 달째 월세가 밀리면서 보증금이 깎이는 상황이다.

A 씨는 "남자 친구와 관계도 원만하지 않고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도어록이 바로 잠길 때까지 안심하지 못한다"며 "지금도 걸어갈 때면 수시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정신과 치료비와 일부 생계비를 지원받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A 씨는 최근 5년 동안 부은 청약통장도 해지했다.

김 씨 측의 합의나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은 전혀 없었다. 가족은 병든 노모뿐이고, 출소한 지 5개월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범행을 저질러 구속돼 있는 김 씨가 합의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없다. A 씨가 책임을 물을 곳이라고는 이제 국가밖에 없다. A 씨는 보호관찰 의무 소홀 책임을 들어 국가배상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A 씨는 "법과 공권력이 이렇게 허술할 줄은 몰랐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자발찌 관리 문제가 바뀌어서 다른 피해자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6개월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지만 A 씨는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검찰은 김 씨에 대해 지난 12일 징역 20년 6개월을 구형했다. 당초 징역 20년을 구형했다가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추가되면서 징역 6개월이 더해진 것이다. 김 씨의 1심 재판 선고기일은 다음 달 12일 오후 2시에 열린다.

hypar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