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없어 여기로"…가로수 아래 더위 피하는 어르신 옹기종기
종로3가 일대 땡볕에도 무료 급식 기다리는 어르신들
"더위 피해 맘 편히 있을 곳 없어…그늘막 더 있었으면"
- 남해인 기자, 윤주현 기자
(서울=뉴스1) 남해인 윤주현 기자 =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 걸리니까 더워도 나와요. 그늘을 못 찾아서 여기 앉아있지."
12일 오전 10시30분쯤 좁은 그늘이 겨우 드리운 서울 종로3가역 1번 출구 앞. 계단 옆 난간에 걸터앉아있던 김태균 씨(68)는 연신 부채질했다.
김 씨는 "그늘막이랑 의자라도 몇 개 놓아서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탑골공원 삼일문 인근 도보 일대에선 더위를 피해 쉴 곳 없는 어르신들이 가로수 아래 그늘을 따라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모자와 선캡을 눌러쓰고 토시를 한 어르신, 목에 수건을 두르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어르신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초여름 더위가 시작됐지만 사람을 만나고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땡볕에도 거리로 나온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와 오전 9시부터 탑골공원에서 무료 급식을 기다리고 있던 정 모 씨(74)는 "그늘을 찾아서 여기에 앉아있다가 급식 먹고 사람들하고 얘기를 나눈다"며 "오후에 볕이 더 강해지면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다닌다"고 했다.
무료 급식을 기다리며 삼일문 앞에 앉아있던 송 모 씨(83)는 "그늘은 여기랑 탑골공원 안밖에 없다"며 "그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여기 앉아있지만 노인들이 이렇게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누가 오고 싶겠나 하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사정이 나은 어르신들은 냉방이 되는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 커피와 콜라를 시켜둔 채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경기 남양주에서 친구를 만나러 온 노 모 씨(80대)는 "커피가 2000원이라 싼 게 아니라서 돈 있는 사람이나 여기 들어와서 쉴 수 있다"며 "바깥에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종로구는 그늘막 숫자가 서울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열린데이터광장의 폭염저감시설 관리 현황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서울에 설치된 고정형·스마트형 그늘막은 총 3444개다.
그중 종로구에 설치된 그늘막은 57개에 불과했다.
자치구 면적 1㎢당 그늘막 수를 계산해도 서초구 8.6개, 강남구 6.05개인 데 비해 종로구는 2.4개로 매우 적은 편이다.
어르신들은 주변 경로당을 무더위쉼터로 이용할 수 있지만 동네 주민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 특성상 방문하기 꺼리는 이들이 많았다.
본격적인 폭염을 앞두고 그늘막이 더 설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종로3가 우정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는 박길성(84) 씨는 "외부 사람 누구나 와도 되는데 잘 안 온다"고 말했다.
송 씨는 "경로당에 갈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서 눈치가 보인다"며 "그나마 마음 편히 앉아있을 수 있게 차라리 그늘을 더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로3가 일대에서 40년 동안 야쿠르트 장사를 한 A 씨는 "어르신들이 무료 급식을 드시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오지만 그늘막이 설치된 건 못 봤다"며 "더운데도 밖에 앉아계실 수밖에 없으니 쓰러질까 걱정인데 그늘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hi_na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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