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이승환의 노캡]

영화 '4등'이 고발하는 1등 지상주의의 민낯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기사와 사진은 관련 없습니다. 2023.10.13/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영화 <4등>은 1등도 아닌, 2등도 아닌, 3등도 아닌 4등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준호는 초등학생 수영선수로 대회만 나가면 4등을 한다. 엄마는 그런 준호를 보면 속이 타들어 간다. 1명만 제치면 메달권(1~3위)으로 진입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준호가 답답해 분통을 터트린다. "지금 먹을 게 입으로 들어가니? 야 4등!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쿠리게 살 거야"(극 중 엄마가 준호에게 한 말). 엄마는 이런 비정상적이고 극성스러운 관심이 모두 준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연락처를 수소문해 아이의 성적을 올려준다는 수영 코치 광수를 찾아간다. 광수는 PC방을 전전하거나 연신 소주잔을 입안에 터는 한량이다. 그러나 16년 전 아시아 신기록을 갈아치운 국가대표 수영선수 출신. 그는 만사 귀찮은 표정을 짓지만 "대회 1등은 물론 대학을 골라 가게 해주겠다"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조건을 하나 제시한다. "준호의 연습 기간 엄마는 수영장에 오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광수는 처음엔 준호를 방치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본격 훈련에 돌입한다. 그 방식은 폭력이다. 오리발과 플라스틱 빗자루, 나무 빗자루로 성장기 준호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체벌이 아닌 '구타'에 가깝다. 광수 역시 유망주 시절 체벌에 시달렸다. 그의 코치 또한 광수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매를 들었다. 광수는 견디지 못하고 수영을 그만뒀다. 광수는 떠올리고 후회하고 확신한다. 그때 지도자가 더 엄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했다고. 그랬다면 어긋나지 않고 수영선수로 성공했으리라는 것이 광수의 왜곡된 기억이자 판단이다.

학대 피해자가 학대 가해자가 되듯, 광수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고 준호도 폭력을 되물림받아 동생을 체벌한다. 이 장면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교육열과 다분히 폭력적인 1등 지상주의를 고발한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1등만 기억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명 희극인의 촌철살인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2등은 1등을 위협하는 라이벌로 주목받는다. 3등은 언제든 2등을 제치고 1등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인재로 인식된다. 관심받지 못하는 이들은 메달권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4등이다. 사람들은 4등이 1등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4등은 지금 어떤 심정이며, 무엇을 도모하려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자 초년병 시절 필자는 '메달권' 실력이 되지 못했다. 한 선배는 술자리에서 진심 어린 조언이라며 말했다. "아직 젊으니, 다른 일 해보는 건 어때?" 필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기자 일을 좋아해 그만두지 못하겠다"는 말이 솟구쳤으나 끝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것이야"라고 선배가 쓴소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간과하는 것은 4등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코치의 가혹한 폭력에 노출된 준호가 수영을 그만뒀다가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온 것은 수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뿐이었다. 자기 일을 좋아하는 것은 '버티는 힘'이 된다.

1등이 수성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2등이 1등을 향해 전력 질주할 때, 3등이 최고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릴 때, 4등은 이 일을 계속할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번민하며 버티고 있다. 그리고 성장한다. 1·2·3등이 1등이 되기 위한 싸움을 하는 동안 4등은 남몰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영화 <4등>의 후반부 장면에서 광수는 준호에게 수경을 선물한다. 선수시절 썼던 수경이다. 준호가 이 수경을 쓰고 출전해 광수의 못 이룬 꿈을 대신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을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광수의 수경을 방안에 둔 채 대회장으로 홀로 향한다. '1등만 기억된다'는 어른들의 무한 경쟁 논리, '행복은 선착순'이라는 승자 지상주의를 거스르고 좋아하는 수영을 하며 물살을 가른다. 그 어떤 역영보다 극적이고 아름다운 파문이 인다. 이날 '1등'으로 경기를 마친 준호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아직 철부지 같은 어른들은 1등이 되기 위해 치졸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mrl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