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안 마신다던 그 할머니, 어쩌다 91세 최장수 무기수 됐나

할머니 6명 마을회관 음료 복용 후 2명 사망[사건속 오늘]
농약 타 넣어…법원 "직접 증거 없지만 정황 넘친다" 중형

2015년 7월 14일 경북 상주시 공성면의 한 마을 할머니 6명이 농약이 든 사이다를 마시고 2명이 사망했다. (TVN 갈무리) ⓒ 뉴스1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9년 전 오늘, 경북 상주시 공성면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로 60년 넘게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던 할머니 2명이 숨지고 4명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91세의 박 모 할머니(1933년생)는 국내 최고령 무기수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옥살이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 초복 다음날, 마을 회관에 모인 60~80대 할머니…시원한 음료수 찾다가

2015년 7월 14일 마을회관에는 65살 막내, 70대 1명, 80대 언니 5명 등 7명의 할머니가 모여 "덥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복(7월 13일) 다음날로 본격 더위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 할머니가 냉장고를 열어 먹다 남은 사이다 페트병을 발견, '이거라도 먹고 더위를 가시자'며 나눠 마실 것을 제안했다.

할머니는 페트병 뚜껑이 사이다 뚜껑이 아닌 박카스 병뚜껑이었지만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

7명의 할머니 중 박 할머니만 '나는 안 마신다'고 했을 뿐 나머지 6명의 할머니는 '시원하다'며 사이다를 들이켰다.

2015년 초복 다음날인 7월 14일 마을 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이 더위에 시원한 음료수를 찾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TVN 갈무리) ⓒ 뉴스1

◇ 극심한 고통에 거품 물고 밖으로, 주민이 발견 119 신고…나머지 할머니들 회관 안에

얼마 뒤 6명의 할머니는 속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을 느껴 데굴데굴 굴렀다.

막내인 60대 할머니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마을회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회관 옆집 할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집으로 돌아가 119 신고를 한 뒤 마을 이장을 찾았다.

구급차가 도착, 막내 할머니에게 응급조치한 뒤 병원으로 향했고 이보다 조금 늦게 마을회관에 온 이장은 회관 안으로 들어가 쓰러진 할머니 5명을 발견, 119를 다시 불렀다.

◇ 2명 사망, 4명 죽다 살아나

119는 상주적십자병원, 김천의료원, 대구가톨릭 병원 등으로 할머니들을 이송했지만 89세 정 할머니, 86세 라 할머니는 끝내 숨졌다.

다른 할머니들도 짧게는 이틀, 길게는 27일간 병원신세를 진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을 뒤집어 놓았고 경찰은 전담 수사팀을 편성, 마을회관을 샅샅이 뒤지는 한편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에 나섰다.

대구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손봉기)는 2015년 12월 11일 오후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경북 상주 '농약사이다사건'의 박모(82·여)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형을 선고 받은 박 모씨가 법정밖에 있던 호송차에 올라타고 있다.2015.12.11/뉴스1 ⓒ News1 이종현 기자

◇ 자연스럽게 의심의 눈초리는 '유일하게 마시지 않은 박 할머니'에게로

경찰은 할머니가 먹다 남긴 사이다병을 수거해 국과수에 성분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사이다 안에 2012년부터 판매가 금지된 고독성 살충제인 '메소밀' 성분이 검출됐다. 메소밀은 무색무취의 농약으로 진딧물 등 해충 제거에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지만 극소량으로도 사람 목숨을 앗아갈 수 있어 판매 금지됐다.

이에 경찰은 '누군가 저지른 계획범죄'로 판단, 누군가를 찾았다.

자연스럽게 혼자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 할머니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 박 할머니 완강히 범행 부인…집주변서 농약 성분 든 박카스병, 집에서 농약병

경찰은 박 할머니를 대상으로 의심스러운 점을 추궁했으나 완강히 부인하는 바람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박 할머니 집 주변에서 '메소밀' 성분이 든, 뚜껑이 없는 박카스병을 찾았다. 또 집에서 9병의 박카스를 추가로 찾아냈다.

중요한 건 마을회관 사이다병 뚜껑이 박카스 뚜껑이었고 제조일자가 할머니 집에서 나온 9병의 박카스와 일치했다는 점.

사이다 병을 막은 뚜껑이 할머니 집 주변에서 발견된 농약 성분이 든 박카스 병뚜껑이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여기에 할머니 집에서 메소밀 농약도 발견됐다.

사건 당일 박 할머니는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먼길을 택해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경찰은 CCTV를 피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TVN 갈무리) ⓒ 뉴스1

◇ 차곡차곡 쌓이는 의심 정황

또 경찰은 △ 박 할머니가 사건 전날 화투를 치다가 A 할머니와 다툰 점 △ 사건 당일 A 할머니 집을 찾아 '마을회관에 갔는지' 여부를 살핀 점 △ 그날따라 평소 자기 집에서 회관까지 다니던 가까운 길 대신 CCTV가 없는 다른 길을 통해 돌아간 점 △ 혼자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점 △ 최초 119구급차가 왔을 때 회관 안에 쓰러진 할머니가 많다고 알리지 않은 점 등 정황 증거를 하나둘 쌓았다.

아울러 △ 박 할머니가 입고 있던 상의와 하의에서 메소밀 성분이 나온 점 △ 회관 안으로 달려 들어온 이장에게 '저 사이다를 마시고 쓰러졌다'고 정확하게 지목한 점 등도 정황증거로 확보했다.

◇ "난 하지 않았다", 농약 든 박카스 병에 박 할머니 지문 DNA 없어

문제는 박 할머니가 "절대로 농약을 타지 않았다" "사이다 병은 건드리지도 않았다"며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는 데다 농약 성분이 든 뚜껑 없는 박카스 병에 박 할머니의 지문이나 DNA가 일절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에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시도했으나 '대구까지 가서 받을 수 없다'는 할머니 측의 완강한 의사에 막혀 무위에 그쳤다.

하지만 검찰은 경찰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박 할머니를 살인 및 살인미수로 기소했다.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으로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모 할머니(82)의 국민참여재판이 2015년 12월 7일 오전 시작됐다. 이번 재판이 진행되는 대구지방법원 11호 법정이 공개 됐으며 역대 최장기로 11일까지 닷새간 열린다. 2015.12.7/뉴스1 ⓒ News1 이종현 기자

◇ 정황증거만으로 재판…역대 최장 5일간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전원 '유죄'

박 할머니는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했다.

이에 대구지법 제11형사부(손봉기 부장판사)는 2015년 12월 7일 배심원 7명과 함께 국민참여재판을 실시했다.

검찰은 4000여 쪽의 자료와 16명의 증인을 동원했고 변호인단은 "지문 등 직접 증거가 없고 범행 동기도 없다"며 맞섰다.

박 할머니는 "오랜 친구, 언니 동생을 죽이려고 농약을 넣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억울함을 외쳤다.

국민참여재판은 11일까지 무려 5일에 걸쳐 진행돼 당시로선 최장 국민참여재판 기록을 세웠다.

결국 7명의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냈고 검찰은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2015년 12월 11일 재판부는 배심원 의견을 받아들여 "피고인은 고귀한 생명을 빼앗고 이번 사건으로 마을 공동체를 붕괴시킨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는 태도가 없다"며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 항소심, 대법원 모두 무기징역형 선고…82살에 옥살이, 현재 91세

박 할머니는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하지만 2016년 5월 19일 대구고법 제1형사부(이범균 부장판사)는 "피고인 측은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일반인 상식과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객관적 사실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건 범인이 피고인임을 가리키는 많은 증거가 있다"며 직접 증거가 아닌 정황 증거로도 충분히 범행이 입증됐다며 1심과 같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도 2016년 8월 29일 "이유 없다"며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82세에 무기수가 된 박 할머니는 91살이 된 현재 최장기 무기수로 옥살이하고 있다.

buckba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