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누명, 외톨이 이민자 구하자"…美 뒤흔든 '프리 철수 리' 운동
한국인 이철수, 두 번의 살인죄에 사형 판결[사건속 오늘]
엉터리 재판·동양인 차별, 결국 '무죄'…"난 악마가 아니다"
- 소봄이 기자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중국인 갱단 간부가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일주일 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에는 용의자로 지목된 여섯 명의 남자가 '라인업' 했다.
그중 당시 스물한 살의 한인 이민자 철수 리(Chol Soo Lee·이철수)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로부터 4년 후, 이 씨는 교도소에서 진짜 살인을 저질렀다.
이 씨를 주목한 건 미국에서 법학 박사를 따낸 유재건 변호사(나중에 한국에 들어와 국회의원을 지냄)와 미국 일간지 최초의 한국인 기자인 이경원이었다.
이 기자는 "이철수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며 누명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렇게 유 변호사와 이 기자의 '프리 철수 리' 운동이 시작됐다.
◇"한국 슬픈 역사 모두 경험한 남자"…이철수, 미국 온 그날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이 씨가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러나 이 씨는 도움이 필요 없다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도와준다'며 접근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불신이 쌓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돌아서지 않고 이 씨를 달래고 설득했다. 특히 이 기자는 이 씨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교도소에 있는 한국인 외톨이의 모습과 미국 유일 한국인 기자였던 자신이 겹쳐 보이면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했다고.
이들의 진심이 통했는지 이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15일 광복절날,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가 모르는 남자한테 몹쓸 짓을 당했고, 이 씨는 그렇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미웠는지 어린아이를 이모한테 맡기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이 씨가 12세가 되던 해, 다시 나타난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린 이 씨는 기댈 곳 없이 외롭게 자랐다.
유 변호사는 이 씨에 대해 "한국의 슬픈 역사는 모두 경험한 남자"라고 말했다. 마침내 마음을 먹은 이 씨는 "변호사님 억울합니다"라며 4년 전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진실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백인에 둘러싸여 '억울한 옥살이'…사형수 될 위기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집에 있던 이 씨는 동료한테 빌린 권총을 호기심에 만져보다가 실수로 총을 발사했다. 다친 사람은 없었고, 출동한 경찰은 총알을 수거해 돌아갔다.
며칠 뒤, 경찰은 이 씨를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했다. 갱단 간부를 살해한 총알과 이 씨가 실수로 발사한 총알이 38구경으로 크기가 같았다. 경찰은 두 사건이 연관 있다고 판단했고, 떳떳했던 이 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인업' 당시 이 씨를 제외한 5명이 모두 중국인이었고, 범인을 겨우 2~3초 목격한 이들은 모두 아시아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백인이었다.
순식간에 범인으로 몰린 이 씨는 변호사 부를 돈도 없었고, 자신을 찾아온 한국 영사관 직원에게만 결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씨의 기대와 달리 직원은 그에게 자백하라며 화를 냈고, 역겹다는 표정으로 면회실을 나갔다. 이 씨의 희망이 물거품으로 변했다. 판사부터 증인까지 백인에게 둘러싸인 그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건 발생 1년 만에 종신형을 선고받게 됐다.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이 씨는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여전히 외톨이였다. 4년 후인 1977년 10월 8일, 이 씨는 백인우월주의자이자 갱단 출신인 동료 수감자 모리슨 니덤의 시비에 몸싸움을 벌이다 그를 살해해 '한국인 사형수'가 될 위기에 처했다.
◇변호사·기자·일본인 친구 뭉쳐 '프리 철수 리'
유 변호사와 이 기자 외에도 이 씨를 돕던 이가 있었다. 일본인 이민 3세인 란코 야마다로, 처음부터 이 씨의 결백을 믿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온 친구였다.
란코는 이 씨가 체포됐을 때 술집을 돌며 조사에 나섰고, 변호사에게 착수금을 주기 위해 댄스파티를 열어 모금하기도 했다. 란코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종신형 선고를 받게 됐다고.
이를 계기로 란코는 '철수를 위해 내가 변호사가 되겠다'며 로스쿨에 들어갔다. 졸업을 앞둔 란코는 이 씨가 교도소에서 두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접했다. 란코가 절망했을 그때, 유 변호사와 이 기자가 등장하면서 세 사람의 '철수 구하기'가 시작된 것이다.
1978년 1월 29일, 6개월간의 취재 끝에 이 기자는 마침내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 '차이나타운의 앨리스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이 씨에 대한 특집 기사를 냈다. 엉터리 재판 과정부터 동양인 차별까지 이 씨의 억울함을 조목조목 꼬집어 알렸다.
진실을 알게 된 한인 교민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아시안 커뮤니티가 들썩이면서 '이철수 구명운동'이 전 미주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인권 단체들이 참여하고, 재심 신청을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이 시작됐다. 모두가 "Justice for Chol Soo Lee"(철수에게 정의를)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유 변호사가 나서서 변호인단을 꾸렸고, 이 기자는 후속기사를 통해 이 씨의 억울함을 계속해서 알렸다. 란코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이때 이 씨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천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에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든,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가두는 건 정당하지 않아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새 '이철수 구명운동'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범아시아적 인권 운동이 됐고, 이 과정에서 'The Ballad Of Chol Soo Lee'(철수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10년 만에 누명 벗고 '자유의 몸'…비극 끝 세상 떠났다
1978년 11월 20일, 이 씨의 재심 재판이 열렸다. 이때 사건 당시 권총을 쏜 범인을 정확히 목격한 스티브 모리스가 '이철수가 범인이 아니다' '내가 경찰에 제보했지만 경찰과 검찰이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등 결정적 증언을 하면서 재심이 받아들여졌다.
구명위원회는 'Free Chol Soo Lee'(철수에게 자유를)라고 구호를 바꾸면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재심과는 별개로 진행된 교도소 살인사건에서 이 씨는 1심에서 유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2월 20일 드디어 이 씨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재심이 시작됐고, 2년 만인 1982년 9월 3일 이 씨는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로스쿨을 마친 란코가 이 씨의 변호사로 활동해 무죄를 끌어냈다.
무기징역을 내린 재판 결과가 뒤집히자, 교도소 살인사건 2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사형수에서 벗어난 이 씨의 보석금은 당시 법정 최고 금액인 25만 달러였다.
유 변호사와 란코가 본인의 집을 담보로 맡기면서 이 씨의 보석금을 마련했고, 이 씨는 1983년 3월 28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약 5개월 뒤, 교도소 살인사건 최종선고 공판에서 판사는 이 씨에게 2급 살인으로 7년을, 불법 총기소유죄로 1년 등 총 8년 형을 선고했다. 앞서 이 씨가 교도소에서 10여년을 복역했으며, 모범수로 복역한 점을 감안해 조건 없는 즉시 석방 명령이 내려졌다.
이 씨는 무려 10년 2개월 만에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재미교포 사회를 하나로 만든 이 씨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철창 밖 세상이 낯설었고, 중국인 갱단의 보복에 두려움을 떠는 등 수감 후유증에 시달린 이 씨는 술과 마약에 빠져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다.
또 그는 갱단 사주로 자신이 저지른 방화 사건 때 얼굴과 몸 전체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제야 방황을 멈춘 이 씨는 수십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고, 남은 생애 동안 마약 퇴치 등 사회 운동에 힘썼다.
이 씨는 소화계통에 생긴 합병증으로 2014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씨 사건은 미국 내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꼬집고, 이에 대항한 소수 민족의 성공적인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꼽히고 있다. 2023년 10월에는 이 씨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가 개봉되면서 재조명됐다.
sb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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