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내가"…대구 주부 살해범 '의문의 자수'
"죄책감에 시달리며 악몽" 공소시효 전 등장 [사건 속 오늘]
물적 증거 없이 진술은 매우 구체적…유족 "살해 동기 아리송"
- 김송이 기자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2015년 5월 10일 반팔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의 가벼운 차림을 한 우 모 씨(당시 42세)가 전북 전주 완산경찰서 서신지구대에 들어섰다.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찾아온 우 씨는 허리춤에서 날카롭고 얇은 40㎝의 회칼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져온 흉기와 유사한 것으로 10여 년 전 대구 수성구에 살던 30대 주부 이 모 씨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산 조회를 해보니 우 씨는 수배범이 아니었다. 우 씨는 "내가 말 안 하면 절대 알 수 없다"며 미제 사건을 풀 열쇠는 자신만이 쥐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때 상황실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들은 대구 수성경찰서 박준식 형사는 11년 전 자신이 담당했던 지역의 한 길거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기억해 냈다.
◇ 목격자도 있었지만 범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박 형사가 떠올린 사건이 발생했던 건 2004년 3월 24일 오전 2시께였다. 세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피해자 이 씨(당시 33세)는 평소와 달리 오랜만에 지인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씨는 당시 인적이 없는 대구 수성구 수성1가 노상에서 한 남성에게 흉기로 가슴과 어깨 부위를 각각 1차례씩 찔렸다. 흉기는 이 씨의 심장을 관통했고, 이 씨는 과다 출혈로 숨졌다.
그때 사건의 최초 신고자이자 목격자인 정 모 씨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고개를 숙이고 차를 스쳐 지나가는 우 씨를 목격했고, 우 씨를 지나치자마자 앞에 있던 이 씨가 쓰러지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목격자 정 씨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했지만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에 경찰은 강도살인을 의심했지만 피해자의 가방 속 지갑도, 몸에 지니고 있던 귀금속도 모두 그대로였다. 성범죄와 연관 지을만한 부분도 없었다. 6개월에 걸친 대대적 수사 끝에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 물리적 증거 전혀 없음에도 발부된 구속영장
우 씨는 수배범도 아니었지만 해당 사건의 용의선상에도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 씨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적이었다.
우 씨는 살인이 일어난 장소를 그리듯 자세히 묘사했고, 피해자를 공격한 부위에 대한 진술도 피해자의 상처와 맞아 들었다. 또한 당시 입고 있었다는 옷도 목격자의 범인 인상착의와 일치했으며, 범행 과정이나 이동 경로 등에 대한 묘사도 세밀했다.
당시 현장에 실제로 있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진술한 우 씨가 진범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즉시 그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 범인 "사채 빚 받으러 갔다가 우발적 범행"…유족 "사채? 말도 안 돼"
우 씨는 이 씨가 대전의 한 사채업자에게 빌려 쓴 700만 원을 대신 받으러 갔다가 피해자가 비명을 질러 우발적으로 살인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우 씨가 진술한 살해 동기를 납득할 수 없다고 했으며, 경찰 역시 우 씨의 살해 동기만큼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 씨의 남편은 "집사람이 굉장히 알뜰했다. 사채 써서 이자를 줄 사람이 아니다. 그 이자가 아까워서 사채를 못 쓴다"고 했고, 친정 동생 역시 "언니는 경제적으로 힘든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저한테 돈을 빌려줄 정도였다. 사채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우 씨는 대전 사채업자에게 선금 50만 원을 받고 대구에 갔다고 했지만 사채업자는 우 씨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으며 대구 쪽에 돈을 빌려준 사실도 없다고 했다. 사채업자와 우 씨 사이에는 통화기록이나 금융거래 기록조차 없었다.
◇ 11년간 억울하게 '아내 살인' 꼬리표 달고 산 남편
경찰은 우 씨의 자백 외 별다른 물리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우 씨의 DNA는 현장에서 발견된 침, 담배꽁초 등에서 나온 DNA 그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만약 우 씨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경우 무죄 판결이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 씨의 남편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 직접 연락해 "범인의 살해 동기가 말이 너무 안 맞다"며 "이런 사람 말이 인정된다면 저는 억울하다. 조사를 다시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해 왔다.
누구보다 범인이 밝혀지길 기다렸을 남편은 왜 범인의 자백을 믿기 어렵다고 했을까. 그는 아내의 상을 치르는 도중에도 두 번이나 조사받았을 만큼 크게 의심받았다. 당시 이 씨의 가족들이 부부 사이가 안 좋았다고 증언했기에 경찰은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에 대해 집중 수사했던 것.
남편의 가게 동료는 당시 남편이 새벽 2시 넘어서까지 가게에 있었다고 증언했으나, 알리바이가 확인된 후에도 남편은 청부살인 의혹을 받았다. 이후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받은 남편에게서는 아무런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남편은 "11년간 꼬리표처럼 범인이라고 의심받았다. 기분 정말 더럽다. 진범이 안 나타나면 끝까지 제가 범인으로 의심받는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 "죄책감에 견디다 못해 자수하러 왔다" 했지만 남 탓만 했던 범인
그렇다면 증거도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 씨가 구태여 공소시효를 4년 남기고 제 발로 경찰서에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 씨는 "악몽에 시달리고 헛것을 본다. 더는 이렇게 살기 싫다"며 11년간의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 고심 끝에 자수를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우 씨는 최면수사도 받을 만큼 범행을 자백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살인 이전 우 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정말 죄책감 때문에 자백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우 씨는 이 씨를 살해하기 전 세 차례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과가 있었다.
우 씨는 자수 당시 경찰에 "2003년 250만 원을 빌려 간 여성을 폭행하고,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한 죄로 10개월의 징역을 살았다"고 고백하며, 판결문의 내용과는 달리 자신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재판받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며 계속해서 피해자를 탓했다.
정신과 전문의는 우 씨가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특징을 가졌다고 분석하며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자기 현실의 괴로운 부분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내 탓이 아닌 다른 개인이나 사회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욕설이나 폭력과 같은 일탈행위를 통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구에서 살인을 저질렀을 때 우 씨의 폭력성을 자극할 만한 상황이 연출됐을 걸로 보인다"며 "그 상황이 일반인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경우여도 반사회성 인격장애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
◇ '3년→1년→2주'…복역하고 나올 때마다 짧아진 재범 주기
우 씨의 확인된 범죄 4건 중 그의 첫 범죄는 1995년 군인 신분으로 저지른 강도상해로 그는 당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형을 마치고 나온 지 3년 만인 1999년, 우 씨는 또다시 강도상해로 3년 6개월 형을 받았다. 당시 우 씨는 미리 소지하고 있던 과도로 술값 지불을 요구하는 가게 여주인의 목을 찔렀다. 이후 2003년 세 번째 범죄를 저질렀고, 형을 살고 나온 지 불과 2주 만에 살인을 저질렀다. 재범 주기가 점점 짧아진 것.
게다가 우 씨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전주에서 한 달에 40만 원을 받는 기초생활 수급자였다. 여기저기를 떠돌다 전주에 온 우 씨는 콩팥절제술을 받아야 했지만 수술비가 없어 수급자 신청을 했다. 우 씨의 진료기록에는 정신질환으로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기록도 있었는데, 상담 일지에는 우 씨의 자살 기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우 씨가 자수한 이유가 정말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참담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2016년 2월 21일 살인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syk1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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