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얼굴에 노란 테이프 '칭칭'…1㎝ 쪽지문 '범인' 무죄, 왜?
강릉 노파 살인 12년 만의 용의자 '유죄 근거 부족' 석방[사건속 오늘]
경찰, 수사 성과 못보자 비구니 친누나 내세워 주민을 범인 몰아가기도
- 소봄이 기자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과학 수사 기법의 발달로 장기 미제 사건이 하나둘 해결되는 가운데, 강원도 강릉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용의자가 12년 만에 특정됐다.
숨진 피해자 얼굴에 붙어 있던 포장용 테이프에서 1㎝ 길이의 '쪽지문'이 발견되면서다. 아주 일부분의 손가락 지문이 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나온 결론은 '무죄'였다. 사건 해결에 혈안이 됐던 경찰이 '가짜 범인'을 내세우기까지 했던 '강릉 노파 쪽지문 살인사건'의 시작은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선으로 손발 묶인 60대 노인…테이프서 발견된 '1㎝ 쪽지문'
2005년 5월 13일,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의 한 산골 마을에서 장 모 씨(당시 69)의 시신이 발견됐다. 장 씨가 숨져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처음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장 씨의 얼굴에는 포장용으로 쓰는 노란색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고, 손과 발은 전화선 등으로 묶여 있었다. 이웃 주민은 "장 씨의 집 현관문과 안방 문이 열려 있고, TV 소리가 들리는데도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장 씨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안방 장롱 서랍이 모두 열려 있었고, 장 씨의 금반지를 비롯해 78만원 상당의 귀금속이 사라졌다. 이에 경찰은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부검 결과 장 씨의 사인은 기도 폐쇄와 갈비뼈 골절 등이었다. 범인이 장 씨 얼굴을 테이프로 감아 숨을 쉬지 못하게 한 뒤, 저항하는 그를 무차별 폭행해 살해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경찰은 범인을 어렵지 않게 검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현장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서 난항을 겪게 됐다.
현장에는 CCTV나 목격자가 없었고, 경찰이 정밀 감식을 진행했지만 깨끗했다. 범인이 지문, DNA, 발자국 등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도주한 것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지문 17점을 확보해 감식을 의뢰했지만, 대부분 장 씨와 그의 가족 지문으로 확인됐다.
이때 장 씨 얼굴을 감은 포장용 테이프 심지에서 흐릿하게 남아있던 1㎝ 길이의 쪽지문이 발견됐다. 테이프를 뜯어서 자르려면 속지를 잡고 당기는데, 이 과정에서 지문이 남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1㎝만의 쪽지문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지문의 끊긴 점이나 곡선 등 13가지 특징점이 뚜렷해야 범인을 찾을 수 있는데, 발견된 쪽지문은 융선과 돌출되는 선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문과 별개로 지목된 용의자가 있었다.
◇"내가 범인" 자백한 수양딸 반전…경찰이 만든 '가짜 범인'이었다
바로 "내가 범인"이라며 자백한 마을 주민 A 씨(당시 45·여)였다. A 씨는 평소 장 씨와 친하게 지냈고 심지어 수양딸로 불릴 정도였다.
또 장 씨에게 200여만 원을 빌리는 등 채무 관계가 있었고, 범행 당일 행적에 대해서도 횡설수설했다. 범행 이후엔 무속인을 찾아가 '장 씨를 살해한 범인이 언제 잡힐 것 같냐'고 묻기도 했다.
A 씨는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해 순간 화가 나 살해했다"면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장 씨의 귀금속은 집 앞의 밭에 버렸다고 구체적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후, A 씨는 돌연 "나는 할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했으나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A 씨는 자백을 강요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장 씨가 사망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 여승이 A 씨 집으로 찾아와 "당신이 살인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에게 큰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덜컥 겁을 먹은 A 씨는 "아들을 위해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여기에 경찰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A 씨를 진짜 범인으로 몰아갔다.
이때 여승의 반전 정체가 밝혀졌다. 바로 사건을 수사하던 담당 형사의 친누나였다.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승인 누나를 이용, '가짜 범인'을 만든 것이다.
A 씨가 집 앞에 던졌다는 패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다른 증거도 없어 결국 그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유력한 용의자가 없어 수사는 사실상 중단, 미궁 속으로 빠졌다.
◇12년 만에 나타난 용의자, '거짓' 반응에도 '무죄', 왜?
경찰의 초동 수사 실패로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은 12년 만인 2017년 돌파구를 찾았다. 1㎝ 쪽지문을 분석해서 누구의 지문인지 확인하는 데 성공하면서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끝에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인근 동해시에 살던 남성 B 씨(당시 50)였다. 지문 특징점 15곳이 일치한 B 씨는 사건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으며 과거 동거녀를 폭행하고 억압, 강간한 뒤 현금과 목걸이 등을 강탈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었다.
특히 B 씨는 범행 시간대에 지인이 운영하는 동해시의 한 술집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인 수사를 통해 B 씨가 당시 술집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알리바이가 정확하지 않았던 B 씨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모두 '거짓'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B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강릉에 간 적도 없으며 전과자라는 이유로 경찰이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주장했다. 쪽지문이 나온 문제의 테이프에 대해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적 있는데 그 안에 테이프가 있었다"면서 이후 오토바이를 도난당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여러 정황을 근거로 B 씨에 대해 강도 살인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기소가 이뤄졌다. B 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법정 공방 끝 1심에서 배심원 9명 중 8명이 B 씨를 무죄로 판단했고,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박스 테이프 안쪽 속지에서 발견된 B 씨의 지문이 유일하다"며 "이 지문은 사건 범행과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경위로 남겨졌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면서 쪽지문만으로 유죄로 판단하기 부족하다고 봤다.
또 B 씨가 이 사건으로부터 약 12년 후에야 범인으로 지목된 점을 언급하며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증거가 흩어지고 일부 없어져 무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B 씨의 방어권 문제도 지적했다.
◇항소심 무죄→검찰, 상고 포기…19년간 '미제 사건'
검찰은 B 씨 범행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B 씨의 진술 분석, 심리 전문가 의견 등을 추가로 법원에 제출해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도 1심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쪽지문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무죄 선고 직후 법정을 나선 B 씨는 "죄가 없으니까 무죄 판결이 난 거 아니겠느냐. 난 모르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대법원까지 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검찰은 1·2심 판단을 번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상고를 포기했다.
이로써 B 씨의 무죄는 확정됐고, 이 사건은 다시 미제로 남아 19년 동안 피해자 장 씨의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전 과정을 지켜본 황준식 당시 홍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은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면 정 씨가 범인이 맞는데 무죄를 받아 안타깝다. 대법원까지 갔으면 원심이 파기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아쉬워했다.
sb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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