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혀 깨문 시골 처녀…"불구 만들었으니 결혼해라" 검사는 조롱

정당방위 인정않고 오히려 '중상해죄' 옥살이[사건속 오늘]
56년 만에 재심 청구…법원 "시대 상황 어쩔 수 없다" 기각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서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 씨가 발언하고 있다. 2023.5.2/뉴스1 ⓒ News1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모든 재판이 시대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냐."

2023년 5월 31일, 일흔일곱살의 할머니가 대법원 앞 1인 시위에 나섰다.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이는 바로 '중상해 가해자가 된 성폭력 피해자' 최말자 씨(78).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18세에 갇혀 한(恨)을 풀지 못한 할머니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최 씨가 시위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그날은 1964년 5월 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제 키스 시도해 혀 1.5㎝ 잘린 남성 "날 병신 만들었다"

사건은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쯤, 경남 김해시의 한 마을에서 벌어졌다. 당시 18세였던 최 씨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집 앞을 서성이던 노 모 씨(당시 21)를 마주쳤다.

노 씨가 "길을 알려달라"며 친구들을 쫓아오자, 최 씨는 친구들이 편히 집에 갈 수 있도록 노 씨를 큰길로 유인했다. 이어 최 씨는 친구들에게 길을 알려준 뒤 돌아섰고, 이때 뒤에서 노 씨가 최 씨의 양쪽 어깨를 잡고 다리를 걷어찼다.

사정없이 바닥에 넘어진 최 씨가 머리를 찧어 순간 정신을 잃자, 노 씨는 그 위에 올라타 키스를 시도했다. 겨우 정신 차린 최 씨는 입에 들어있던 노 씨의 혀를 뱉은 뒤 집으로 도망쳤다. 이때 노 씨의 혀 1.5㎝가 잘렸다.

며칠 뒤 노 씨는 친구 10여명을 대동해 최 씨의 집을 찾아왔고 마구간에 있는 소를 끌고 나가거나 부엌에 있는 식칼을 들고나와서 마루를 두드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노 씨는 "날 병신 만들었다" "사람을 불구로 만들었으니 책임져라"고 주장했다.

이에 최 씨 가족들은 노 씨를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고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 씨 가족은 최 씨 측에게 "혀가 끊긴 것도 인연이니 벙어리가 된 아들과 결혼하자"고 터무니없는 제안을 했다. 또 '결혼하지 않을 거면 돈을 달라'며 위자료 20만원을 요구했다. 최 씨 가족이 이를 거절하자, 노 씨는 최 씨를 중상해죄로 맞고소했다.

경찰은 최 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노 씨에 대해 강간미수, 특수주거침입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은 사건 발생 넉 달 만에 최 씨가 이 사건의 '가해자'라며 수갑을 채웠고 강압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1965년 당시 판결문. (CBS 라디오 갈무리)

◇"결혼하면 해결돼" 수갑 채운 검찰…피해자-가해자 뒤바뀌었다

검찰은 "고의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며 오히려 최 씨를 중상해 혐의로 구속했다. 게다가 검사는 실실 웃으면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야 하지 않냐. 결혼하면 해결된다"고 최 씨를 조롱했다.

심지어 재판부는 최 씨에게 강제로 키스당하던 상황을 재연시켰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최 씨와 노 씨를 데려와 현장 검증을 하는 등 최 씨를 동네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재판부는 "노 씨와 결혼할 생각이 있냐"며 합의를 제안했고, 최 씨는 "차라리 벌을 받겠다. 죽어도 저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법원도 검찰 논리를 그대로 따라 최 씨에게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특히 최 씨가 혀를 깨문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사는 "비록 강제 키스로부터 처녀의 순결성을 방위하기 위해 한 것이라도 혀를 끊어버림으로써 일생 말 못 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한 것은 정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쳤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고, 최 씨가 노 씨로 하여금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킨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명 가해 남성인 노 씨의 성폭행 혐의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주거침입죄만 인정돼 최 씨보다 가벼운 형량인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최 씨는 구속 수사를 받느라 6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최 씨의 부친은 딸이 교도소에 있을 때 논 한 구역을 판 돈으로 노 씨와 합의까지 했다. 그야말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MBC 갈무리)

◇"가해 남성 월남 파병도 갔는데"…재심 청구 모두 기각

판결 이후 억울한 주홍 글씨를 단 최 씨는 세상의 따가운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견뎌야 했다. 못 배운 게 한이 된 최 씨는 60세가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해 '성 사랑 사회'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 다시금 과거를 떠올렸다.

최 씨는 '내가 걸어온 길, 앞으로의 길'이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놨다. 이 과정을 지켜본 방통대 동기가 최 씨에게 "서울로 가자"고 제안하면서 재심 청구의 첫 삽이 떠졌다.

2018년 12월, 쏟아지던 '미투' 물결에 용기를 얻은 최 씨는 '한국 여성의 전화'를 찾아가 처음으로 판결문을 봤다.

최 씨는 노 씨가 사건 4개월 후 1등급을 받아 군대에 가고 월남 파병도 갔다는 점을 들어 '중상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재판 과정에서 최 씨가 강제 구금되는 등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재심 근거로 들었다.

그렇게 최 씨는 사건 발생 56년 만인 2020년 5월,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2021년 "당시 판결은 노 씨가 말하지 못하는 상태, 즉 발음하는 데 곤란을 느끼는 불구 상태로 보고 최 씨에게 판결을 내렸던 것"이라며 "재심할 만큼 바뀐 사실은 없다"고 판단, 이를 기각했다.

동시에 "청구인에 대한 공소와 재판은 반세기 전에 오늘날과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일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사회문화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순 없다"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의 재심 청구 기각 결정문을 꼼꼼히 읽어 본 최 씨는 납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 조롱당한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최말자 씨. ⓒ News1

◇대법원은 '묵묵부답'…최 씨 "부끄러운 대한민국 법 체제" 비판

최 씨는 즉각 항고했지만, 부산고법 역시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바로 최 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3년 가까이 아무런 대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대법원의 판단만을 기다린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2023년 5월 31일, 최 씨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땡볕 1인 시위에 나섰다. 그는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탄원서와 함께 시민 1만5000여 명이 참여한 서명을 제출했다.

최 씨는 이날 제출한 탄원서에서 재심 청구 기각에 대해 "모든 재판에서 시대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 법원은 내 사건과 같은 재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법 체제를 스스로 인정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 사건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제 사건의 재심을 다시 열어 명백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시 정의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해 구시대적인 법 기준을 바꿔야만 여성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sb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