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액 테러'가 성범죄 아니라고?"…유사 판례 분석해 보니
현행법상 '신체접촉' 없으면 성범죄 처벌 어려워[리뷰1]
처벌 조항 담긴 법 개정안 발의됐지만 국회서 '낮잠'
- 박동해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최근 경남 사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남학생이 여교사가 사용하는 텀블러에 체액(정액)을 넣은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이를 '성범죄'로 처벌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실제로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체액을 이용한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성범죄로 처벌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4일 뉴스1이 지난 2년(2022년 4월~2024년 4월) 사이 체액을 타인의 물품에 뿌리는 행위를 처벌한 사례 6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이중 '성범죄'로 처벌된 것은 단 1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건은 모두 재물손괴나 주거침입 등 다른 혐의로 처벌됐다.
◇성적 목적 뚜렷해도 성범죄 처벌 안 돼
텀블러 사건과 유사한 사례로 지난 2021년 11월5일 포항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여성 피해자의 립스틱에 남성이 자신의 체액을 집어넣는 사건이 있었다. 이건 역시 '재물손괴' 혐의만 인정돼 피의자는 벌금 6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체액을 이용한 범죄가 성범죄로 처벌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현행법상 신체적 접촉이 없는 경우 성범죄로 처벌할 마땅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성적인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범행의 경우에도 성범죄로 처벌이 되지 않는 유사 사례들이 있었다.
2022년 8월4일 경기 동두천시에서는 남성 A 씨가 빨래건조대에 널린 피해자의 팬티를 사용해 자위행위를 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이전에도 5차례에 걸쳐 같은 피해자의 집에 무단 침입해 동일한 범행을 저질러 15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은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A 씨에게 적용되는 혐의는 성범죄가 아닌 주거침입과 재물손괴였다. A 씨는 1심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성범죄 안 되니 '휴지 재물손괴'로 처벌도
여성의 주거지에 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침입해 자위행위를 하는 행위도 별도로 처벌할 조항이 없다. 결국 재산상의 피해가 경미함에도 굳이 재물손괴를 적용한 사례도 발견됐다.
지난 2022년 4월 부동산중개 보조업을 하는 B 씨는 오피스텔에 사는 20대 여성에게 '손님과 함께 방문할 예정이니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며 주거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B 씨는 방을 둘러보면서 피해 여성의 속옷 등을 보게 되고 손님이 돌아간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자위행위를 했다. 이후 B 씨는 피해자 집에 있던 화장지에 체액을 묻힌 뒤 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집안에 두고 나왔다.
이 경우에도 피의자가 '자위행위'를 목적으로 여성의 주거지에 침입한 것이 확인됐지만 성범죄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무단으로 사용해 주거 침입한 것과 화장지와 비닐봉지를 사용한 것이 재물손괴로 인정돼 기소됐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6월 대구 중구에 거주하던 남성이 옆 호실의 여성의 집에 무단으로 진입해 자위행위를 한 사건도 있었다. 피의자가 범행 중 피해자의 침대에 체액을 떨어뜨린 행위를 재물손괴로 봐 처벌했다.
◇들고 있던 가방 안에 체액 뿌려…'강제추행' 처벌
물론 명확한 신체적 접촉이 없더라도 타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체액을 뿌리는 행위를 '강제추행'이라고 판단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 2022년 6월10일 서울동부지법 형사5단독 장민경 판사는 지하철에서 여성들의 가방에 자신의 체액이 담긴 콘돔을 집어넣은 혐의로 기소된 C 씨에 대해 재물손괴에 더해 강제추행을 인정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C 씨는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여성들을 몰래 따라가 미리 준비한 체액이 들어 있는 콘돔을 가방에 넣는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적발된 행위만 2020년 11월부터 2021년 6월까지 10건이었다.
C 씨와 변호인은 '강제추행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 판사는 "피고인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 피해자들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추행죄에서의 '추행'에 해당한다"며 "피해자들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 자체가 추행 행위라고 인정되는 이른바 '기습추행'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다만 이 판례는 피의자가 피해자에게 근접해서 들고 있는 가방에 체액을 묻힌 사건으로, 피해자와 떨어져 있는 물건에 체액을 묻힌 사건과는 양상이 다르다. 이외에도 피해자가 입고 있는 옷에 몰래 다가와 체액을 묻힌 사건에서도 성범죄가 인정된 바 있다.
◇관련법 발의됐지만 발전된 논의는 없어
해당 사건 판례 이후에 유사한 사건이 성범죄로 처벌된 사례는 한건도 확인되지 않았다. 심지어 '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여성의 주거지에 침입해 자위행위를 하고 체액을 물건에 뿌린 것이 확인됐지만 성범죄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건과 같이 비전형적인 성범죄가 계속해 발생함에 따라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피해자들에게 명백히 성적인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유발하는 행위는 성범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 2021년 7월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물건을 이용한 음란행위' 조항을 신설하는 성폭력특례법 일부개정안의 국회에 발의됐다.
해당 개정안은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을 상대방의 주거, 직장, 학교, 그 밖에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소에 두어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안을 검토한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도 '현행법으로는 처벌의 공백이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며 '타당한 입법 조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2021년 9월 법사위에 상정된 이후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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