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되풀이된 '비동의 강간죄' 논란…씁쓸한 결말

더불어민주당 총선 정책 공약으로 내세웠다 사실상 철회
국내에선 찬반 대립 끝에 좌초…해외 '동의 개념' 명시 추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오후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한 광장에서 기자회견 중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4.3.27/뉴스1 ⓒ News1 김용빈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총선을 앞두고 '비동의 강간죄' 도입 논란이 되풀이됐다. 야권을 중심으로 총선 공약으로 제시되면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둘러싼 해묵은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총선 정책 공약에 비동의 강간죄가 들어간 데 대해 "실무적 착오"라고 해명하면서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2030 남성들의 표심을 의식한 정책 후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당 정책위 정책실장은 27일 공보국을 통해 "비동의 간음죄는 공약 준비 과정에서 검토되었으나 장기 과제로 추진하되 당론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며 "실무적 착오로 선관위 제출본에 검토 단계의 초안이 잘못 포함되었음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비동의 강간죄 뭐길래?

앞서 민주당은 총선 10대 정책공약 중 하나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강간죄를 내세웠다. 녹색정의당, 새로운미래 등도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약속했다.

형법 제297조는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로 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로 인정돼 성폭력 범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입법 시도는 번번이 좌절돼 왔다. 동의 여부를 입증하기 쉽지 않고, 피해자 진술만으로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게 반대 측 주장이다.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6일 "실무에서는 피해자가 내심으로 동의했는지 여부로 범죄 여부를 결정하게 되면 고발당한 사람이 동의가 있었단 것을 입증해야 한다"며 "원래 입증책임이 검사에게 있는데 입증책임이 혐의자에게 전환된다. 그랬을 경우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27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3.27/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동의 개념 명시 세계적 추세…"명백한 거부의사 표현 등 요건이라도 넣어야"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해외 입법례를 살펴보면 동의와 관련한 규정을 구체화해 단순히 동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유죄가 되진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형법상 성폭력범죄의 판단기준 및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우리 성폭력법체계가 동의 모델로 변경된다고 해 성폭력 성립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전면적으로 바뀔 우려는 없으며, 오히려 기존에는 유형력의 정도에 대한 판단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이 혼재돼 그 판단 기준이 모호하고 일관되지 못했던 부분이 발전될 수 있다"고 짚었다.

강간죄에 동의 개념을 명시하는 것은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피해자 동의 여부에 중점을 두도록 강간죄 구성요건을 개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2021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보고서를 통해 모든 국가에 강간 정의에 '동의 없음'이 포함되도록 명문화할 것을 권고했다.

현재 영국, 독일, 스웨덴, 캐나다, 미국 일부 주 등은 피해자 동의를 중심으로 성폭력법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또 국제사회 요구에 따라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관련 법제를 바꾸고 있다.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형법상 강간죄에 '동의' 개념을 명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1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시사하는 내용을 담았다가 법무부 반대로 철회했다. 이번 민주당의 사실상 공약 철회도 법안이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던 전철을 밟은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성범죄 전문 이은의 변호사는 "비동의 간음죄는 유엔 권고 사항으로 형법을 개정해야 하는 게 맞다"며 "단 통번역의 한계가 있다 보니 해석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비동의라는 말이 추상적이거나 범위가 너무 넓다면 강간 개념에 '명백한 거부 의사 표현'을 요건으로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존 반대 입장이 갖는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지만 이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며 "명백한 거부 의사 표현이 있었는데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성립되지 않는 등 현장의 피해자 목소리를 생각해보면 현행 법체계는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Ktig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