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괴한 탄 엘베서 비명, 주민 모두 외면…홀로 뛰어든 여대생

하교 중 女초등생 쫓아가 폭행 납치 미수, 상습범[사건속 오늘]
경찰은 단순 폭행 처리, 피해 초등생 부모가 범인 전단지 배포

사건 당일 촬영된 CCTV. (MBN 뉴스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아파트 통로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여자 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입주민들은 현관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대학생이었던 장모(당시 20세) 씨는 아이의 비명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섰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한 남성이 귀가 중이던 초등학생 아이를 붙잡아 무차별 폭행한 뒤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절박한 구조 요청을 듣고 뛰쳐나왔던 장 씨와 달리 인근 주민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취재진들을 향해 "그런 일 가지고 자꾸 귀찮게 하지 말라"며 나 몰라라 하는 주민도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반응한 여성 덕분에 A 양은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장은 그를 두고 '우리 사회의 영웅'이라 칭했다.

◇몸 던져 아이 구한 주민…경찰은 CCTV 보고도 '단순 폭행' 분류

사건은 16년 전인 2008년 3월 26일 오후 3시 44분쯤 발생했다. 하교하던 초등학교 3학년 A 양은 집으로 가기 위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A 양을 뒤따르던 한 남성은 다짜고짜 발길질을 하더니 A 양을 문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A 양은 온 힘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소리를 듣고 집에서 뛰쳐나온 장 씨는 급히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겁에 질린 아이를 발견하곤 자신의 집으로 무사히 데려왔다. 인기척을 느낀 범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여성은 도망가는 범인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장 씨는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리니까 잘못될까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뛰어 나갔다"라며 "살려달라는 소리가 굉장히 긴급했다. 그 시간대는 되게 조용했다. 그래서 더 잘 들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EBS 갈무리)

표 소장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구조에 나섰다. 용감한 여대생은 우리 사회의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며 칭찬했다.

그러나 장 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주위에서 잘했다고 하시니까. 왜 칭찬 받는지 모르겠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신속하게 이뤄졌던 신고와 달리 경찰의 대응은 안일했다. 현장에 출동한 지구대원은 A 양 가족만 조사하고 목격자에 대한 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 범행 장면이 그대로 담긴 CCTV 영상을 확인하고도 '단순 폭행 사건'으로 분류해 경찰서에 보고했다.

경찰의 부실 수사에 분노한 A 양 부모는 수배 전단지를 직접 만들어 아파트 일대에 배포했다.

◇언론 통해 사건 CCTV 공개…대통령, 일산경찰서 방문해 질책

범인이 붙잡히지 않은 사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발생 나흘 뒤인 30일 SBS는 입수한 CCTV 영상을 단독 보도했다. 이후 경찰청 홈페이지, 온라인 게시판 등에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들도 경찰의 안일한 대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급기야 대통령이 경찰서에 직접 방문해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경찰이 이래서는 안 된다. 만일 어린 아이가 잘못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범인을 빨리 잡지 못하면 또 다른 데 가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다"며 "여러분처럼 하면 어린 아이를 가진 부모가 어떻게 안심하고 살겠나. 단순 폭행 사건이라고 처리하는 것이 온당하냐. 범인을 빨리 잡으라"며 경찰을 질책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부실수사 책임을 물어 일산경찰서 형사과장, 대화지구대장 등을 비롯해 총 6명의 경찰관을 직위해제하고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 동거녀 신고로 붙잡힌 범인…"성폭행하려고 쫓아갔다" 진술

범인은 동거녀의 신고로 닷새 만인 31일 붙잡혔다. 납치 미수 용의자는 이명철(당시 41세)이었다. 경찰은 이 씨가 지하철 3호선 수서역에서 내린 사실을 확인, 인근 상점 등을 집중 수색해 오후 8시 30분쯤 대치동의 한 사우나에서 검거했다.

초등생을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친 범인이 도주하는 모습. (MBN 뉴스 갈무리)

경찰 조사를 통해 이 씨는 사건 당일 술을 마신 상태로 지하철을 탔고 대화역 인근에서 내려 인근 아파트까지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에서 이 씨는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다 마주친 어린이가 쳐다보자 성폭행을 할 목적으로 뒤쫓아가 폭행하며 납치를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이 씨는 미성년자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거나 미수에 그친 혐의로 구속 기소돼 10년간 복역하고 2년 전 출소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는 1995년 12월 수서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8세 여아를 비상 계단으로 끌고가 성폭행하려 했으나 아이가 도망쳐 미수에 그쳤다. 이듬해에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8세 여아를 다른 아파트로 끌고 가 강제추행했다. 또 5세 아이와 7세 아이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이번 초등생 납치 미수 사건으로 이 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8년으로 감형됐다. 2009년 2월 12일 대법원은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8년을 복역한 이 씨는 2016년 4월 출소해 사회 곳곳을 누리고 있다.

ro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