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로 기록된 의병장, 손자의 집념 115년 만에 '명예회복'[리뷰1]

호남서 의병 활동한 윤상형 지사 삼일절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외손자 염동은 씨 "가족인 것에 영광"…전영숙 조사관 추적 빛나

편집자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해명과 반박이 거듭되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왜곡된 파편만 남게 됩니다. [리뷰1]은 이슈의 핵심을 한눈에 파악하고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전문가와 현장의 목소리도 함께 담겠습니다.

독립유공자 외손자 염동은 씨가 28일 깅기 의정부 자택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2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박동해 기자 = "할아버지는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의병대장이셨어."

염동은 씨(81)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이런 설명을 듣고 자랐다.

평생을 교직에서 종사하다 은퇴한 염 씨는 10년 전부터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믿기지 않던 어머니 말 한마디로 시작된 집요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염 씨가 손에 쥔 단서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윤상형), 생년(1886년), 출신(나주)과 어머니의 회상에서 언급된 '광주교도소'라는 단어뿐이었다.

일단 무작정 광주교도소로 향했다. 그곳엔 수형인 기록이 남아 있을 테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광주교도소에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이후 광주지방검찰청, 광주지방법원 민원실에 직접 찾아가 문의했지만 어디에도 외할아버지의 흔적이 없었다. 결국 남은 마지막 장소는 국가기록원이었다.

국가기록원에 제적등본을 제출하고 기다림 끝에 그의 손에 쥐어진 사료가 바로 '수형인명부'였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작성된 이 서류는 외조부의 과거를 찾는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수형인 명부에 적힌 윤상향의 죄명은 '폭동·강도'. 염 씨는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과 전혀 딴판인 기록에 당황했다.

"어머니는 외조부께서 의병대장을 하셨고, 백마 타고 돌아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수형인명부에 적힌 죄명이 '폭동, 강도'라니, 난감했죠. 그래서 광주지법도 찾아가서 판결문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던 염 씨는 2021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문을 두드렸다. 이듬해 9월 조사개시 결정을 받았다. 죄명이 왜 '폭동, 강도'인지에 대해 알고 싶었고, 외조부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독립유공자 외손자 염동은 씨가 28일 깅기 의정부 자택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며 자료를 살피고 있다. 2024.2.2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 조사 시작부터 난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의 함정"

조사 신청서를 받은 전영숙 진화위 조사관은 첫 단계부터 난관을 만났다. 염 씨가 진화위에 제출한 수형인명부에 나온 인물이 윤상형 지사와 동일인이라는 게 맞춰지지 않았다. 명부에 적힌 주소와 출생지는 오류가 있었고 본적지와 명칭이 달랐다. 전 조사관은 "호남 지역의 의병을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의 책은 일단 다 읽어보고 그분이 김율 의병부대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여러 의문점이 생겼다"며 당시 조사 과정의 고충을 털어놨다.

실마리는 의병 역사 관련 전문가인 홍영기 순천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해답은 1914년에 부군통폐합으로 진행된 행정구역 개편에 있었다. 윤 지사가 체포된 연도는 1909년이지만 그로부터 5년 뒤 도로명이 변경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주소는 그때의 기준으로 사용되는데 그걸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전 조사관은 그때부터 약 3개월간 개편 이전의 옛 지명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는 전산화가 안 되어 있던 시절이기에 전 조사관은 일단 호남 지역에 관련된 자료를 다 읽어봤다고 했다. A4용지 박스 하나 이상으로 담긴 논문을 읽어야 했다. 본적을 알아야 사람을 정확히 찾을 수 있는데 당시에는 본적이 살고 있던 주소로 적혀 있어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의병부대원 200여명의 주소지까지 참고해 샅샅이 뒤졌다.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주소 '나주군 일면 남산리'는 윤 지사의 거주지 '나주군 이로면 봉산리'의 오기였다는 결론이 나왔다.

출생지로 기록된 '나주군 도림면'은 1914년 부군통폐합으로 '나주군 삼도면'으로 변경됐다. 이 주소는 윤 지사가 1916년 5월31일 이사한 '나주군 삼도면'과 동일한 지역임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윤상형 제적등본에 본적지로 기재된 '나주군 삼도면 지평리'와도 동일한 지역이었다. 또 김율 의병부대의 '의병가맹자명부'에 적힌 연령을 고려했을 때도 정확히 계산이 들어맞았다. 1907년 말쯤 '의병가맹자명부'에 적시된 윤 지사의 나이는 21세였다. 2년 후인 1909년 수형인명부에 적시된 나이는 23세,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얻었다.

하나가 풀려도 이해되지 않는 질문은 꼬리를 물고 나왔다. 윤상형 지사는 왜 주소지를 변경했을까. 당시 1908년에 나주경찰서 관내 함평 주재소는 같은 지역 수비대와 함께 김율 의병부대원 중 함평군 거주자 72명에 대한 수색에 착수했다. 김율 의병부대의 '의병가맹자명부'가 일본군에 노출되자 명부에 적힌 가족들이 이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군 기록에는 '대부분은 이미 가족 재산 등에 이르기까지 각기 처분하고 빈집만 남아있었다'고 돼 있다.

전영숙 조사관은 조사 당시 의병 부대원들의 나이를 보며 다시 한번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율 의병부대원들의 평균 나이는 20대 중반이에요. 정말 어린 친구들이 목숨 걸고 싸운 거죠. 그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무기도 제대로 된 게 없던 시절에 일본 경찰이나 헌병을 상대로 싸웠다는 용기가 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분들 후손이 분명 몇 명 더 살아계실 것 같은데 신청 기간은 끝났지만, 국가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유공자 외손자 염동은 씨가 28일 깅기 의정부 자택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며 자료를 살피고 있다. 2024.2.2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 "애국장 감개무량, 가족이란 사실만으로 영광스럽다"

진화위에서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은 1년6개월여 후인 지난해 6월이었다. 진화위는 "윤상형이 1907년 12월경부터 김율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사실과 1909년에 체포되어 '폭동', '강도'의 죄명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한 사실을 객관적인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진화위는 국가보훈부에 "윤상형의 항일의병운동이 진실로 규명됐으므로 '과거사정리법' 제34조 및 제36조에 따라 국가는 윤상현의 의병 활동 위상에 맞는 독립유공자 포상 절차를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윤상형 지사는 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포상한 103명에 포함됐다. 건국훈장과 대통령표창은 3·1절 중앙기념식장과 각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된다. 이번 건국훈장 수훈자는 17명(애국장 4명, 애족장 13명), 대통령 표창 수훈자는 86명이다.

윤상형 지사는 건국훈장의 4번째 등급인 애국장을 받았다. 진화위 신청 후 2년 2개월, 조사관이 조사를 시작한 지 1년 7개월, 윤 지사가 의병 활동으로 형을 받은 지 115년 만이다. 집안에서 손가락질 대상이었던 윤 지사의 명예는 외손자의 발품과 조사관의 집념으로 회복됐다.

염동은 씨는 지난 2월17일 보훈부로부터 포상 결정을 처음 통보받았다. 염 씨는 "확정됐을 때 감개무량했다"며 "독립유공자 가족인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제가 외조부님의 명예 회복을 도왔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라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염 씨는 이후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 산소를 차례대로 방문할 계획이다. 외조부님 묫자리를 모르지만 생전에 사셨다는 김제 지역의 흙이라도 채취해 안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youm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