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직포에 덮인 시신, 전과 18범의 피 묻은 신발…시골 방앗간 '미스터리'

미제로 남은 '함안 방앗간 할머니 살인 사건' [사건 속 오늘]
허술한 초동 수사 결정적 증거 확보 실패…유력 용의자 무죄

(SBS '궁금한 이야기Y' 갈무리)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14년 전 오늘 경남 함안군 군북면의 한 한적한 시골 마을 방앗간에서 피로 범벅이 된 76세 할머니 박 모 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인은 다발성 두개골 골절로, 경찰은 할머니가 단단한 둔기로 수십 차례 머리를 공격당해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 이웃 남성인 용의자 김 모 씨(당시 31세)를 긴급 체포했다. 경찰이 탐문 수사를 하던 중 한겨울 마당에서 빨래하고 옷가지들을 소각하고 있던 김 씨를 수상하게 여겨 그의 물건을 압수했는데, 예상대로 김 씨의 운동화에서 숨진 할머니의 혈흔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씨는 증거 불충분으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2심과 대법원에서도 같은 결정이 이어졌다. 결국 1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미제로 남은 '함안 방앗간 할머니 살인 사건'. 김 씨를 범인으로 가리키는 여러 정황이 있었음에도 그는 어떻게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을까.

(SBS '궁금한 이야기Y' 갈무리)

◇ 부직포에 덮인 시신, 우물에 버려진 쇠망치와 벽돌…원한관계의 면식범일 가능성 농후

할머니가 발견된 건 2010년 2월 21일이었다. 시골에서 홀로 방앗간을 운영하는 시어머니와 몇 날 며칠 연락이 닿지 않자 걱정이 된 며느리가 동네 주민들에게 방앗간에 가볼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고, 동네 어르신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박 씨가 피범벅이 된 채 부직포에 덮여있었던 것.

할머니는 얼굴과 머리를 집중 공격당한 모습이었다. 현장에 침입 흔적이나 뭔가를 뒤진 흔적이 없었고, 사라진 금품도 없었던 점 등으로 미뤄 봤을 때 경찰은 원한 관계가 있는 면식범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통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현장을 벗어나기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구태여 부직포로 시신을 덮어놓은 행동 또한 면식범들이 보이는 행태였다.

살해 도구로 쓰인 둔기는 방앗간 내 우물에서 발견됐다. 범인은 우왕좌왕한 흔적 없이 방앗간 내부 구조에 익숙한 듯 할머니의 시신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9개의 혈흔을 떨어뜨렸는데 그 흔적은 우물로 이어졌다. 우물 안에서는 쇠망치와 시멘트 벽돌 2개가 나왔지만, 물에 잠겨버린 범행 도구에서는 DNA와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

◇ 용의자는 전과 18범…동네 골칫덩어리였지만 박 할머니만은 따뜻하게 보살폈다

결정적 단서 없이 수사를 이어가던 경찰은 약 3주 뒤 유력 용의자를 긴급 체포했다. 용의자는 할머니의 집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고 있던 30대 남성 김 씨였다. 김 씨는 경찰의 탐문 수색이 시작되자 황급히 빨래를 하고 뭔가를 불태우기도 했는데,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김 씨의 집에서 혈흔이 묻은 운동화를 발견해 냈다. 김 씨의 왼쪽 운동화에는 직경 4㎜ 정도의 동그란 원형 혈흔이, 오른쪽 운동화에는 피가 묻은 후 문질러진 흔적이 있었는데, 감식 결과 혈흔은 피해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의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김 씨는 전과 18범으로 동네에서도 수시로 행패를 부리는 소문난 골칫덩어리였다. 동네 사람 모두가 김 씨를 꺼렸지만 박 할머니만은 그를 보듬었다. 할머니는 김 씨에게 돈도 빌려주는 등 그를 가족처럼 돌봐줬으나, 할머니가 주변에 '김 씨에게 돈 빌려주지 마라. 자꾸 술 먹는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자 김 씨가 앙심을 품은 것이라고 경찰은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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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화 혈흔은 사건 후 부직포 들추다 묻은 것…사건 당일은 다슬기 잡으러 나갔다"

김 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자기 신발에 묻은 혈흔에 대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현장에 달려갔다가 부직포를 들춰보는 과정에서 혈흔이 신발에 떨어진 것뿐'이라고 진술했다. 또 빨래를 했던 까닭은 기억나지 않으며 소각한 건 단순 쓰레기였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2월 20일 오전 10시 15분께 김 씨가 할머니 집 대문 앞에 있었다는 것을 봤다는 제보도 있었으나, 김 씨는 한겨울에 제철도 아닌 '다슬기를 채취하러 가기 위해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엉성한 변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김 씨의 왼쪽 운동화에 떨어진 직경 4㎜의 동그란 원형 혈흔이 낙하혈이 아니라, 김 씨가 피해자를 둔기로 타격하는 과정에서 흩날린 비산혈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진행한 자체 실험으로 부직포를 들어 올리면서 떨어진 피는 동그란 원형의 혈흔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강한 충격을 받아서 튄 피가 수평으로 뻗어가면서 운동화에 떨어지자 원형을 유지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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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에 족적 있었으나 검안의가 덧신 안 신고 수사…현장 보존 실패로 결정적 증거 효력 사라져

김 씨 측 변호사는 김 씨가 둔기로 머리를 무차별 공격했다면 운동화에 묻은 혈액의 양이 그렇게 적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도 직접 범행을 목격한 이가 없고 혈흔은 간접 증거이기 때문에 김 씨가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현장에는 살인의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할머니 집의 거실에는 할머니의 것이 아닌 족적이 있었고, 벽과 냉장고에도 혈흔이 묻어 있었던 것. 문제는 초동수사에서 현장에 출동했던 검안의가 덧신을 신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찰은 당시 해당 족적이 검안의의 발자국이라고 단정해 증거를 수집하지 않았다. 이로써 거실에 있던 흔적이 범인의 것인지, 검안의의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어졌고, 더 이상 재판 자료로도 쓰일 수가 없게 됐다.

이에 대해 김복준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찰이 전과 18범의 프로를 만났는데 너무 느슨하게 수사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오로지 운동화에 떨어진 원형 혈흔 하나 가지고 충분할 것이라고 본 건데 엄청난 실수였다. 초동수사에서부터 현장 보존에 실패한 아주 대표적 사례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초동수사를 소홀히 했기에 이런 무참한 결과가 나왔다"고 지적했다.

syk1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