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현세는 천재와 싸워 어떻게 이겼을까[이승환의 노캡]
"하루하루 꾸준히 걷다보면 천재 추월하는 자신 발견"
- 이승환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쯤, 만화가 이현세가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 '해 지기 전에 한 걸음만 더 걷다보면…'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신동이라 불렸던 이현세가 '진짜' 천재를 만나고 절망에 빠진 사연이 글에 담겨 있다.
만화계에 갓 입문한 이현세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날밤을 새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이 있는 동료 만화가는 달랐다. 한 달 내내 술만 마시다가 며칠 휘갈겨 그린 그림이 이현세의 만화를 압도할 만큼 뛰어났다.
이현세는 재능을 원망하고 만화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리하여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공포의 외인구단' '떠돌이 까치' '남벌' 등 1980~1990년대 인기작을 포함한 4000여권의 작품을 남긴 이현세는 현재 한국 만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로가 돼 있다.
이현세는 해당 기고 글에서 천재를 추월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재들은 항상 먼저 가기 마련이고, 먼저 가서 뒤돌아보면 세상살이가 시시한 법이고, 그리고 어느 날 신의 벽을 만나 버린다…(중략)…이처럼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해서 지나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필자도 기자 초년병 시절 '천재'를 만난 적 있다. 두세 기수 위였던 그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기자업계에서 '홈런'에 비유되는 특종 단독을 주요 이슈 때마다 터트렸다. 회사 간부가 선배를 따로 불러 '이거 중요한 거니, 한 번 파고들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선배를 믿고 '에이스'로 인정하니까 초대형 기획 프로젝트를 맡긴 것이다.
그리하여 선배는 계속 승승장구했을까? 아쉬운 일이지만 선배는 '게으른 천재'였고 독불장군 기질이 너무 강했다. 성과를 낼수록 오만해진 선배는 동료들의 조언이나 지시를 수용하지 않았다. 회식 등 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성과자를 은근히 비하하는 발언도 했다. 선배에 대한 업계 평판은 악화했으나 누구도 선배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선배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는 결국 다른 회사로 이직했으나 그 후 두각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들은 적 없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리오넬 메시는 10대 후반 나이에 이미 축구황제 펠레와 마라도나를 넘어설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출전했던 2006년 월드컵부터 2018년 월드컵까지 우승을 경험하지 못하고 좌절해 눈물을 흘렸다.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2022년 12월이었다. 축구선수로서 황혼기였던 35세 때였다. 메시의 개인 기량은 천재적이었던 젊은 시절보다 후퇴한 뒤였으나 '축구도사'라 불릴 정도로 동료들을 활용할 줄 알았고 팀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문화예술계와 스포츠계, 언론계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천재는 큰 주목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어떤 재능도 '지구력'을 당해낼 수 없다. 재능에만 의존하는 천재를 이기는 법은 열정과 성실함, 꾸준함이라는 의미다. 이현세의 이런 조언은 재능이 없어 초년병 시절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들었던 필자에게 여전히 큰 힘이 되고 있다.
물론 리오넬 메시처럼 지구력 있는 천재도 가끔 있다. 이현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천재들은 너무나 많은 즐거움과 혜택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들의 갈 길을 제시해 준다. 나는 그런 천재들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만 해도 가슴 벅차게 행복하다."
오만함과 싸워야 하는 우리 시대의 천재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가 아닐까. 필자가 몸담은 언론계에서도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해 주는' 천재를 만나고 싶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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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