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의 메디컬인사이드] 의료개혁? 무정부적 의료공급체계부터 개편해야
김윤(서울대 의대 교수ㆍ의료관리학)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4년을 '의료개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응급실 뺑뺑이' 뉴스를 보면서 나한테 저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국민, 새벽 6시부터 병원에 줄 섰지만 접수 번호 43번을 받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지쳐 잠든 아이와 엄마들, 치솟는 의사 몸값을 감당할 수 없어 의사를 구하지 못해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같은 필수 과목 진료실 문을 닫은 지방 병원들, 이젠 아프면 큰 도시까지 나가야 하는 의료취약지에 사는 주민들. 지난 한 해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무너지면서 고통 받았던 국민에게 복지부 장관의 신년사는 큰 희망을 주는 말이다.
장관이 약속한 대로 올해가 의료개혁 원년이 되려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과 함께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올해 의대 정원을 확대해도 졸업생 배출이 늘어나는 2031년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의사 부족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개편해야 지금 배출되는 의사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의사 수를 늘려도 지금 같은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로는 부족한 곳에서 일하게 할 수 없다. 지난 5년 간 대도시의 인구당 의사 수는 의료취약지에 비해 동네 의원 의사의 경우 9배, 종합병원 의사의 경우 2배 더 많이 늘었다. 낙수효과로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개편하는 첫 단계는 과잉 공급돼 있는 응급·중증·소아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을 수요에 맞게 적절한 수의 병원만 전문센터로 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의사 인력을 집중시켜 부족한 의사 인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지역응급센터 3곳 중 2곳, 심장병 환자와 뇌졸중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은 3곳 중 1곳만 전문센터로 지정하면 된다. 종합병원 3곳 중 2곳만 소아 전문센터로 지정하면 기존 소아과 전문의만으로 24시간 365일 진료하는 체계를 운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전문센터의 응급과 중증 환자 진료에 대한 건강보험 수가(진료비 가격)를 획기적으로 올려줘도 건강보험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재정이 늘어나지도 않고, 건강보험 재정이 낭비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전문센터로 지정된 병원들이 진료 분야별로 6~7명의 전문의를 고용해도 이익을 낼 수 있을 만큼 건강보험 수가를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다. 전문센터를 지정하지 않고 건강보험 수가를 올려주면 너도나도 돈이 되는 진료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의사와 환자가 모두 분산돼 건강보험 수가는 올려줬는데 응급실 뺑뺑이는 계속될 것이다.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그대로 건강보험 수가를 올리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돈만 들이고 효과는 없을 것이다.
둘째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보고 있는 의사들이 동네 병의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먼저 오른 건강보험 수가로 늘어난 병원 수입이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손 보험제도를 개편해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진료해야 할 대학병원 교수들과 종합병원 전문의들이 통증 치료 같은 비급여 진료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동네 병의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외국 민간의료보험처럼 가입자와 보험회사뿐만 아니라 환자를 진료하는 병의원도 실손보험 계약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병의원이 비급여 진료비 가격을 마음대로 높게 책정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고, 실손보험을 이용해 비급여 진료를 남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동네 병의원 개원의들이 실손보험과 비급여 진료로 수입을 계속 늘려나가면, 건강보험 수가를 아무리 올려도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의사들이 동네 병의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유능한 복지부 공무원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할 일을 의료현장을 잘 모르는 책상물림 교수가 주제넘게 훈수를 둔다고 타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도 주제넘게 훈수를 두는 이유는 복지부 장관의 신년사에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개혁하겠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의료정책이 힘센 의사와 병원에 원칙 없이 휘둘리는 바람에 우리나라 의료공급체계는 무정부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이는 의사 부족과 맞물려 대한민국 의료체계를 붕괴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이번에도 의사와 병원 눈치 보느라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질서 있는 의료시장'으로 개편하는 의료개혁을 하지 못하면 의대 정원을 늘리고 건강보험 수가를 올려봐야 응급실 뺑뺑이, 소아 진료대란, 지방 의료체계 붕괴는 막지 못할 것이다.
ksj@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편집자주 ...중증 응급, 소아, 분만 등 붕괴 위기에 처한 필수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 교수는 의사 수를 늘리는 것과 동시에 '나쁜 의료제도'를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때로는 '논쟁적 존재'가 되는 그가 '김윤의 메디컬인사이드'를 통해 의료계 문제를 진단하며 해법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