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당하고 당한 줄 모른다"… '가스라이팅 범죄'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

현실감·판단력 상실…안 당해보면 모르는 심리적 학대 상태
"언어폭력 동반, 지속 노출되면 정상 판단 못해…초기 대처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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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홍유진 기자 = "밥 먹고 보고해. 세수하고 나서도 보고해. 잠도 정해준 만큼만 자."

이 같은 방식으로 함께 일본 유학에 간 동창을 5년간 사실상 노예 취급하며 1억6000만원을 갈취하고, 폭행으로 뇌출혈까지 이르게 한 20대 남성이 지난 4일 구속 기소됐다.

피의자 A씨(24·남)는 고등학교 동창 B씨(24·남)와 일본에서 함께 생활하며 B씨 일상 전반을 통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B씨를 게임 회사에 취직시켜 준 척 속이기도 했다. A씨는 '우선 게임 승수를 올려야 한다'는 식으로 B씨를 회유한 뒤 게임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벌금을 매기거나 체벌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범죄' 요소를 갖추고 있다. 특히 타국 생활 중인 상황을 이용해 피해자를 외부 인간관계로부터 고립시키는 방식은 가스라이팅 범죄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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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가스라이팅 피해자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나온다. 하지만 누구라도 가스라이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서서히 이뤄지는 데다가, 일단 심리적 지배 상태로 들어서고 나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서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극한의 학대' 상태인 셈이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서서히 심리적 지배를 당하면 누구든지 착취 상황에 놓일 수 있다"며 "부족해서 가스라이팅에 넘어갔냐는 둥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접적인 범죄 피해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지 가스라이팅은 가족,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누구나 당할 수 있고,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게 가스라이팅"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가스라이팅은 주로 언어폭력을 동반한다. 별다른 이유 없이 책임을 전가하고, 잘못을 돌리는 등 피해자를 비하하고 몰아세우는 식이다. 이러한 언어폭력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완전한 심리적 지배 상태에 빠지기 전 초기 대처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피해자와의 관계가 단절되기 전에 가스라이팅 피해가 의심되는 주변인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피해를 막는 방법이다.

곽 교수는 "가스라이팅으로 이어지기 전에는 의심이 들거나, 과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이때 끊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타인과 충분히 의논할 수 있는 관계를 많이 맺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cyma@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