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덮친 방배동 비닐하우스촌…겨울 매년 두렵지만 떠날 수 없는 주민들

"골목 좁아 소방차 진입 안되고 쉽게 타"…화재 사망사고 잇달아
부촌 속 그린벨트…상수도, 배수로 등 기본적 시설조차 개발 제한

10월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 비닐하우스촌에서 발생한 화재로 80대 노인이 숨졌다. 숨진 주민의 집. 2023.11.2/뉴스1 ⓒ News1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지난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 비닐하우스촌에서 만난 A씨는 이틀전 화재를 또렷이 기억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8시쯤 평소와 달리 조금 소란스러운 바깥 소리에 나와보니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불기둥이 무섭게 치솟고 있었다.

마을 가장 안쪽과 입구쪽에 비상소화전이 설치돼 있었지만, 그날 화재로 숨진 고 임모씨(80)의 집은 그 어느쪽과도 가깝지 않았다. 더구나 비닐하우스집들은 불에 쉽게 타는 소재로 만들어졌다. 나무 판자로 가벽을 설치하고 그 위에 천막을 겹겹이 둘렀다. 비를 피하는 지붕은 검은색 차광막으로 대신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산 A씨는 그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대피하라고 외쳤다. 좁은 골목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비닐하우스촌 구조상 불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임씨의 집에서 난 불을 시작으로 3가구가 전소됐다.

A씨는 "막상 (진화)하려니까 다들 노인들이라 빨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방차도 길이 좁고 복잡해 진입도 하지 못했다"며 "산 위에 우면산 경찰특공대 사람들이 내려와 소방 호스를 연결해주기도 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임씨는 일주일에 두 번은 투석을 위해 병원에 다니며 이곳 비닐하우스촌에 혼자 살고 있었다. 경찰은 현장 1·2차 감식을 끝내고 국과수에 정밀검사를 의뢰해 화재 원인을 밝힐 예정이다. 타살 혐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A씨는 "몸도 편찮은데 집도 다 타고, 안타깝지만 만약 살아계셨으면 갈 곳이 없어서 더 지옥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화재·침수 무한반복…배수로·도시가스도 없다

고인의 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무너져 있었다. 옆집도 불이 옮겨붙어 벽에 덧댄 스트로폼 등 속살이 여실히 드러났다. 집 위로 아슬하게 엉켜있던 전기선도 불에 그을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합선 또는 그 이상의 위험이 교묘히 비껴간 모습이 아찔했다.

비닐하우스촌은 그 어느 곳보다 화재의 위험성이 취약하게 노출된 곳이다. 도시가스도 사용할 수 없어 주민들은 액화석유가스(LPG)통을 집밖에 내놓고 사용하고 있다. 천막에 구멍을 내 가스줄을 집안으로 연결해놨다. 어떤 집은 겨울에 사용할 연탄이 허리 높이만큼 쌓여있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전원마을 비닐하우스촌 곳곳에 있는 연탄과 액화석유가스(LPG)통 2023.11.2/뉴스1 ⓒ News1 유민주 기자

집앞에 뜯지 않은 번개탄을 꺼내두던 B씨는 때가 되면 연탄 봉사를 하러 오는 학생들도 다들 놀란다고 멋쩍게 웃었다. B씨는 "어떤 학생은 보더니 집이 아니라 '닭장' 같다고 했다"며 "사람 사는 곳 맞냐고들 하는데, 다들 더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화재 사고는 올해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다. A씨가 사는 동안에만 4번의 불이 났고 그때마다 이웃들을 잃었다. A씨는 20년 전 딸 셋을 키우던 이웃집에 불이 나 일가족이 숨진 사고가 일어났던 해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A씨는 "아무래도 10대 여자 아이들이 살다보니 안전상 이유로 창문이 안 열리게 부모가 고정을 시켜놨는데 그것 때문에 탈출을 하지 못해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올해 1월20일 새벽에도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택 60여채를 태우고 5시간 만에 진화됐다. 판자촌 특성상 집들이 밀접히 붙어있고 골목이 좁아 소방차 진입이 어려웠던 탓이 컸다. 다행히 큰 인명 사고는 없었지만 삽시간에 번진 불로 주민 500여명이 대피했다.

겨울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름 장마철에는 배수로가 없는 탓에 매년 침수 피해를 당한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좁은 골목 흙바닥에 깔린 천조각들이 습기를 머금고 꿉꿉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이번달 중 소방서와 합동으로 화재감지기, 화재 누전 전기차단기, 소화장비보관함, 장비 작동 점검 등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30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 전원마을에서 한 어르신이 연탄보일러의 연탄을 갈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감염 우려에 따른 봉사 신청이 줄며 연탄 후원이 크게 줄었다. 2020.11.30/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 법 보호도 못 받는 무허가 건물 속 주민들…"선택 아닌 생존 문제"

1980년대부터 지역 철거민들이 모여들면서 만들어진 방배동 비닐하우스촌은 아직까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있다. 이곳에 설치된 비닐하우스들은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허가 건물이다. 상수도, 배수로 등 시설 개발에 여러가지 제한이 있는 이유다.

반면 방배동 전원마을은 2002년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그린벨트가 해제됐다. 그 후 고급 단독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부촌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정원에 소나무가 심어진 주택가 사이에 비닐하우스촌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어 이질감이 들었다.

비닐하우스촌은 현재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지만, 기본적인 상수도 시설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땅 주인이 따로 있는 탓에 서울시에서 공동 수도시설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기름이 떠 있는 우물 물을 마실 수 없던 주민들은 남태령역 인근 우면산 경찰특공대 앞에 수도 장비를 땅에 묻고 거기서 물을 끌어다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린벨트 지역은 건축물의 신축·증축, 용도변경, 토지 형질변경 및 토지분할 등 행위가 전적으로 제한된다. 단, 관할 자치단체장 등의 승인 또는 허가를 받아 구역설정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개발이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도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하루하루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삶을 사는 이들에겐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A씨는 "살기 힘들어도 그저 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시에서 임대주택으로 다른 곳에 살게 해준다고 해도 여기 사람들은 월세조차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전원마을에 있는 비닐하우스촌 진입구. 왼쪽은 담벼락이 있는 단독주택, 오른쪽은 판자촌 주택이 보인다. 2023.11.2/뉴스1 ⓒ News1 유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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