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의 메디컬인사이드] ‘의대생 추첨제’ 네덜란드 의료, 한국보다 낫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편집자주 ...중증 응급, 소아, 분만 등 필수 의료가 무너지고 있다. 의사 수 부족이 원인으로 거론되나 의료 현장에서는 보다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 교수는 의사 배출을 늘리는 것과 함께 '나쁜 의료제도'를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때로는 '논쟁적 존재'가 되는 김 교수가 앞으로 '김윤의 메디컬인사이드'를 통해 의료계 문제를 진단하며 해법을 제시한다.

28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2022.12.28/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우리나라는 의과대학생 중 고소득층 출신, 수도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심각하게 높다.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2020년 기준 의대생의 81%가 소득 상위 20% 고소득층 출신이었다. 나머지 소득 상위 20% 출신 고등학생이 나머지 80%에 비해 의대에 입학할 확률이 16배 높은 셈이다.

수도권 출신 비중도 높다. 지방 의대생 중 47.6%가 수도권 출신이었고, 이들 중 80%가량은 졸업 후에 다시 수도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지방 의대가 수도권 출신 의대생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으니, 가뜩이나 의사가 부족한 지방에 의사가 더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소득층 출신, 수도권 출신이 의대생이 대부분인 이유는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기 때문이다. 수시 입학에서는 성적 이외의 면접이나 논술 등으로 평가하지만 '스카이캐슬'을 방불케 하는 대한민국 사교육을 당해낼 순 없다. 결국 정시뿐만 아니라 수시도 좋은 학원이 많은 곳에 살고 한 달에 몇백만원씩 하는 학원비를 부담할 능력이 있는 수도권 고소득층에 유리하다.

하지만 선진국은 성적만 가지고 의과대학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지원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고려해 선발한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의사가 되고, 교수가 돼야 환자를 더 잘 진료하고, 학생들을 더 잘 교육할 수 있고, 연구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에 의하면 환자들이 자신과 같은 인종인 의사의 처방에 1.3~1.5배 더 따르고, 소수 인종 의사가 백인 의사들에 비해 저소득층과 소수 인종 환자를 2배 더 많이 진료한다고 한다.

학원비 등 교육 물가가 12년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 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앞으로 시민이 지나고 있다. 2023.4.7/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저명한 의학자로 구성된 미국 의학원과 미국 의과대학 협회는 의사 집단이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야 의료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 1991년 미국 의과대학협회는 10년 동안 의대생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소수 인종 출신 신입생을 2배 이상 늘리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소수 인종 출신 의대생을 1.6배가량 늘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이지만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의대생을 뽑으려 노력하니 고소득층 출신 쏠림이 우리나라처럼 심하지는 않다. 미국 의대생 중 소득 상위 20%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50% 수준이다.

네덜란드의 의대생 선발 방식은 가히 파격적이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의대생을 선발하기 위해 전체 의대생의 30~50%가량을 추첨으로 선발한다. 추첨 선발 방식은 1972년 도입돼 50년 가까이 사용되다가 2017년 잠시 중단됐으나 2023년 다시 도입됐다. 추첨 방식이지만 성적이 좋으면 선발될 확률이 높다. 성적 상위 2% 학생은 하위 30% 학생에 비해 추첨 기회가 3배 더 많다.

지방 출신과 중산층 이하 출신을 더 많이 뽑아야 한다. 서민 출신 의사가 있어야 서민들의 삶과 병을 더 잘 치료할 수 있고, 지방 출신 학생을 의대생으로 선발해야 지역에서 일할 의사가 배출된다. 지방 의과대학의 지역 출신 선발 비율을 현재 20~40%에서 60~80%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소득 상위 20% 출신이 전체 의대생의 50%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의대 학생 선발 과정을 개선해야 한다. 대학이 의대 진학을 원하는 모든 학생을 위한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선발 과정에서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입시반을 운영하는 의대 광풍도 의대 입학을 매개로 한 부의 세습도 약화될 것이다.

이쯤 되면 고장 난 녹음기 소리처럼 되풀이되는 의사들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제로 입학한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으냐, 성적도 안 되는 학생 뽑아서 의료의 질이 떨어지면 결국 환자가 손해다." 등등. 네덜란드 사례에 대한 여러 연구에 의하면 성적으로 선발된 학생이 추첨으로 선발된 학생에 비해 반드시 의대 성적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추첨으로 선발된 학생의 중도 탈락률이 10%가량 높기는 했다.

상위 1% 학생만 의대에 간다고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인 네이처가 선정한 전 세계 의학을 선도하는 100대 병원 중 대한민국 병원은 한 개도 없지만 네덜란드 병원은 8개 포함돼 있다. 네덜란드 의료체계는 2021년 미국과 유럽 10개국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2위를 기록했다. 상위 1% 의대생만 뽑는 대한민국에 비해 추첨으로 의대생을 뽑는 네덜란드의 의료 수준이 훨씬 더 높다. 성적 상위 1% 학생만 실력 있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의사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가짜뉴스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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