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수출국 1위 불명예 韓…70~80년대 해외입양 급증 이유는?

[해외로 거래된 아이들]⑧80년대 해외입양 자율화, 대외비 속 수치 급증
국제입양 위한 '고아 만들기' 의심도

편집자주 ...1970~1980년대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명암이 뚜렷하게 공존하고 있다. 당시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친부모가 살아있는 아이를 호적상 '고아'로 조작해 해외로 입양을 보낸 것은 불법 인권침해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지난 64년간 해외로 입양된 아동만 약 16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인원이 고아로 조작됐는지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없었다. 뉴스1은 최근 한 달 간 법무부·경찰청·보건사회부의 기·미아 통계와 각종 논문·연구 결과를 분석하고 이제는 성인된 '고아호적' 입양아를 직접 만나 해외로 거래된 아동들의 실태를 추적해봤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원태성 기자 = '아기 수출국.'

1970~80년대 전세계가 한국을 바라본 시각이다. 오명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당시 기록된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군사정권의 해외 입양 정책 변화와 함께 1980년대 10년 동안 6만5511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보내졌다. 특히 1985년에는 이 수치가 8837명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외 입양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사회적 문제로 여겨졌던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가 아물 때쯤인 1970년대 중후반부터 오히려 해외 입양은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대외비로 추진한 해외입양 자율화 정책은 급증하는 해외입양 수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가 해외 입양 자율화 정책을 추진하는 동안 허위문서 제작, 신분 세탁 등 불법적인 행위들까지 벌어진 정황이 드러났다. 게다가 아이 한 명을 입양 보내고 받는 수수료가 5000달러 수준으로 당시 1인당 국민소득(4571달러)보다 높았다는 사실은 정부의 방임 속 아이들이 거래됐다는 의혹을 더욱 키웠다.

80년대 후반까지 이른바 '3저(低) 시대'로 경제 호황기였지만 당시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해외 입양은 '아동 수출'로 여겨지며 본격적으로 산업화된 셈이다.

(보건복지부 제공)

◇'이민 확대 및 민간외교'…80년대 해외입양 자율화, 대외비 속 수치 급증

'해외에 아이를 판다'는 북한 등 외부의 시선을 의식했던 1970년대 유신정권 당시 해외입양 감축을 목적으로 각종 정부 차원의 정책이 도입됐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입양 활성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숫자에 비례해 해외입양 숫자를 배당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이는 매년 국내입양을 10%씩 늘려 1985년에는 해외입양을 중단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등장을 전후해 '자율화'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급변했다.

당시 정부가 '이민확대 및 민간외교' 차원에서 해외입양을 접근하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해외입양 쿼터제는 사라졌다.

1980년 10월16일자 경향신문에는 '해외입양과 관련 기존의 1985년까지 혼혈아동을 제외하고는 해외입양을 억제·종료하기로 했으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바꿔 해외입양을 전면 개방할 것'이라고 보도됐다.

당시 보건사회부(보사부) 의안 202호로 보고된 '입양 사업 개선책'에는 '국외입양 감축정책으로 시설보호대상아동의 증가현상과 입양희망 우방국의 계속적인 요구 등이 있어 왔다'고 명시돼 있다. 즉 해외입양 정책 변화가 국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닌 해외 요구, 외교 차원에서 결정된 셈이다.

문제는 해외 입양 자율화 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그 과정은 철저히 비공개로 이뤄지면서 아동을 자체적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는데 필요한 복지체계를 구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소홀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허가를 통해 지정한 민간 입양기관에 해외입양 절차를 전적으로 맡겼고 이들 기관은 정부 시스템이라는 보호 속 무리한 입양을 진행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7년 고아입양특례법 개정을 통해 해외입양 업무는 정부에서 허가받은 기관에서만 하도록 명시하면서 관련 비용은 양부모에게 청구하도록 했다. 이에 발맞춰 1964년 대한사회복지회, 1971년 동방아동복지회(1972년부터 입양사업 시작)가 설립됐고 입양기관을 통한 해외입양은 일종의 아동복지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해외입양 자율화 정책이 대외비 양식으로 논의됐던 것처럼 당시 언론에서는 이에 대한 보도가 제한됐다. 특히 정부가 대외비로 추진한 해외입양 자율화 정책은 정책이 결정된 1981년 언론을 통해 전혀 보도되지도 않았다.

이 과정에서 입양 절차를 담당한 민간 입양기관을 중심으로 허위문서 제작, 신분 세탁 등 불법적인 행위들이 자행됐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늘어나는 기·미아 관리?…국제입양 위한 '고아 만들기' 의심

해외 입양 자율화 정책의 또다른 목표 중 하나는 늘어나는 기·미아 관리였다.

그러나 1970~80년대 초반의 기·미아 발생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급증했다. 1980년의 1만1251명에서 1983년 1만5249명으로, 1984년에는 1만8172명으로 5년 만에 60% 이상이 늘어났다.

당시 입양특례법 상 입양 대상 아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들 기·미아를 포함한 요보호아동의 증가는 해외입양의 자율화 상황에서 해외입양의 필요성을 더욱 강화했다. 정부는 당시 언론 통제 상황 속 관련 기록을 북한의 흑색선전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를 근거로 1980년부터 1987년 시기 내내 일절 공개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이 시기 기·미아 아동 수치 증가를 들여다보면 석연찮은 부분들 또한 존재한다.

1970~80년대 언론에 공개된 경찰청과 보건사회부(보사부), 법무부의 기·미아 아이 통계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고아 호적 등 해외입양 관련 서류 조작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수치 차이가 가장 큰 시기는 1985년이다. 이때 경찰청 통계상 기·미아 아동수는 443명에 불과하지만 보사부 통계는 1만4230명에 달했다. 같은 조사 대상 통계지만 보사부의 수치가 경찰청의 32배 이상인 셈이다. 법무부 통계상 기·미아 아동은 9287명이었다.

경찰청 통계 추산 방식은 유기된 상태로 발견된 아이를 집계하는 것이다. 보사부 통계는 부모가 아이를 입양기관에 맡긴 경우도 포함하고 있다. 법무부 통계는 법원이 '고아 호적'을 새로 발급해 해외입양된 아동 수를 토대로 집계됐다.

보사부와 법무부 통계에는 실제로 유기된 기·미아가 아니라 고아 호적으로 조작된 아동까지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신필식 입양연대회의 사무국장은 "보사부 통계 속 기아 아동 수는 실제로 유기된 아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외 입양시 그 대상이 기·미아 아동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지적했다.

kha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