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노리고 방화?…구룡마을 이재민들 "한파보다 2차 가해 더 시리다"

소방당국 "전기 요인에 의해 화재…방화 의심 흔적 아직 없어"
이재민들 "엄동설한에 방화 말도 안 돼"

설연휴가 끝난 25일 서울의 한 재활용센터에서 작업자가 스티로폼 포장재를 분류하고 있다. 2023.1.25/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서울=뉴스1) 한병찬 기자 = "인터넷에선 보상 받으려고 그랬다는데…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을 뿐입니다"

설 연휴가 끝난 25일 오전 10시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현장에서 만난 이재민 박모씨는 한참을 까맣게 타 버린 집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하 18도의 기록적 한파에 눈썹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박씨는 "여기가 우리 집이었어요. 나도 피아노 보고 알았잖아"라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덕 위에 위치한 '구룡마을 화재민 비상 대책 본부' 텐트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땅바닥에 나뒹구는 연탄 조각과 유리 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비상 대책 본부 천막에선 이재민들이 연탄불을 피워놓고 타버린 집을 바라보며 회의 중이었다.

지난 20일 오전 6시27분쯤 강남구의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한 화재로 주민 500여명이 대피하고 이재민 62명이 터전을 잃었다.

구룡마을 이재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30년 넘게 살아온 터전을 삼킨 화마와 기록적 한파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더 힘들다고 호소했다.

구룡마을 화재가 벌어진 20일 이후 화재를 보도한 뉴스에는 이재민과 주민들을 비난하는 댓글로 도배됐다. 인터넷에서 일부 누리꾼들은 '재개발을 노리고 일부러 방화한 것이 아니냐', '빌딩을 몇 채씩 가지고 있다', '호텔에서 편하게 쉬네' 등 확인되지 않은 댓글을 달며 이재민을 조롱했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화재 원인을 '전기 요인'으로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다. 방화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 소방당국과 경찰의 공통된 지적이다.

두 기관은 폐쇄회로(CC)TV가 거의 없는 구룡마을에서 화재 목격자 진술에 의존해 조사를 이어왔다. 화재 현장 주변에 의심스러운 인물이나 방화 장면을 목격했다는 제보 또는 신고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민들은 방화 가능성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화재 현장에서 만난 최초 신고자 신모씨(72)는 "내가 오전 6시에 화장실 갔다가 전깃불이 번쩍이는 걸 직접 보고 신고했는데 방화는 말도 안 된다"며 "집터를 잃어 갈 곳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정말 속상하다"고 털어놨다.

이어 "살면서 처음 가본 호텔은 정말 좋긴 한데, 내 집이 아니라서 붕 뜬 느낌이고 감옥 같다"고 덧붙였다.

손에 검댕을 묻혀 가며 타버린 집기를 뒤적이던 이재민 A씨도 "오히려 불이 나면 쫓겨나기 때문에 주민들은 불이 안 나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빌라가 몇 채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닌 여기서 무슨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고생하겠냐"며 일축했다.

이재민 B씨는 "동네 전기가 오래돼서 누전이 잘 되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전기가 튀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면서 "이 엄동설한에 어떤 주민이 불을 지르겠냐"며 반문했다.

이태원(73) 구룡마을 협의회 회장은 "설 연휴에도 매일 아침 임시 숙소에서 나와 구룡마을에 있었다"며 "설 연휴에는 이재민들과 주민들이 구청에서 받은 떡국을 연탄불에 데워 나눠 먹었다"고 전했다.

이어 "누전돼서 불이 났는데 인터넷에선 보상받으려 방화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며 "댓글을 안 보려고 하지만 속상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구룡마을은 정부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며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뒤 생활 터전을 잃은 철거민이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에 모여 생긴 동네다. 강남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구룡마을에는 주민등록상 60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재민 대다수는 강남구청이 마련한 관내 호텔에 머물고 있다. 강남구청은 임시 거주 공간을 오는 27일까지 운영하고 연장을 원하는 이재민에게는 1주일을 추가로 제공할 방침이다. 그 이후에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보유한 위례지구 내 임대주택에 거처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강일 구룡 토지주 주민 협의회 회장은 "구룡마을 주민 대다수가 70~80대라 임대주택 월세를 걱정할 뿐 아니라 가족 같은 이웃들과 30년 이상 살아온 터전을 떠나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SH·강남구청·서울시가 복구 작업과 후속 조치와 관련해 긴밀하게 협력,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화재로 사라진 집터를 둘러보고 있다. 설 연휴 전날인 지난 20일 오전 구룡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로 주택 60채, 면적으로는 2천700㎡가 소실되고 이재민 62명이 발생했다. 2023.1.25/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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