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겨울]⑨"칼바람 막을 건 숨죽은 패딩뿐"…겨울옷에 드러나는 가난

혹한기 앞둔 거리의 사람들…'종이상자 집'이 보호막
구멍난 옷·때 묻은 침낭…"무료급식 없는 날은 굶어야"

편집자주 ...또 겨울이다. 없는 이들에게 겨울은 더 혹독하다. 경기는 바닥을 향하고 있는데 물가마저 치솟고 있다. 여기에 금리까지 올라 빚 부담에 허리가 휠 지경이다. 올겨울을 어떻게 나야 할지 막막하다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기침체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어쩌면 민생을 살펴야 할 이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되지 않을까. [편집자 주]

서울역광장에서 한 노숙인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2021.1.28/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봄 같았던 가을이 끝나고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됐다. 겨울외투에 따라 한파의 체감온도는 천차만별이다. 여름옷에 비해 겨울옷이 더 비싼 탓에 옷차림만으로도 경제적 상태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이 가장 힘든 계절인 동시에 가난을 숨기기 어러운 이유다. ◇떠날 곳 없는 이들의 정거장, 서울역

(서울=뉴스1) 이비슬 한병찬 기자 = </strong>지난 28일 서울역 분주한 사람들 속에 중절모를 쓴 남자가 영국 신사처럼 서 있었다. 한 손에 우산, 다른 한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은 그의 손등은 겨울바람에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남자는 낡은 롱패딩 안에 군복과 베이지색 카라 티셔츠를 겹겹이 껴입었다. 3년째 입었다는 패딩 곳곳에 눌어붙은 하얀 담뱃재와 커피 자국은 그간의 생활을 짐작하게 했다. 팔꿈치와 엉덩이 부위에 찢어진 틈으로 삐죽 나온 하얀 솜이 바람에 나풀댔다.

주변 여행객들은 옷장에서 갓 꺼낸 듯 빳빳한 외투를 여미고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사이에서 원래 색깔을 가늠하기 힘든 김성곤씨(65)의 패딩은 한기가 그대로 몸에 스밀 만큼 숨이 죽었다.

자영업을 하며 사장님으로 불리던 김씨가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9년째다. 김씨는 "겨울을 날 대책이 있겠느냐"며 "추울수록 바닥에 박스를 많이 깐다"고 말했다.

서울역은 출발선이자 정지선이다. 꿈을 좇아 고향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작은 섬을 이뤘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몸이 아픈 사람 사연은 제각각이다.

28일 오후 서울역 앞에서 만난 김성곤씨 모습. 22.11.28/뉴스1 ⓒ 뉴스1 한병찬 기자

"라면 하나만 사주면 안 돼요?"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 한분이 다가왔다.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그는 냉장고 박스 위에서 노숙 생활을 한 지 3년째다. 서울역 광장은 이제 그의 집이자 고향이라고 했다.

그는 모자를 눌러 쓰는 것이 습관이다. 대화 중에도 천이 떨어져 해진 모자를 연신 내리느라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울 와서 거지가 됐다는 얘기 들을까봐, 고향 사람을 만날까봐. 걱정이 가득한 남자는 누렇게 변한 마스크 뒤에 다시 얼굴을 숨겼다.

겨울을 맞은 서울역 사람들은 옷을 겹겹이 껴입은 탓에 몸집이 두 배 가까이 불어 보였다. 기름진 머리에 때가 타 까만 손.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모를 때 묻은 의복엔 삶의 흔적이 그대로 기록돼 있었다.

몸 하나를 누일 만한 각자의 종이박스 주변으로는 비에 젖지 않도록 옷을 담은 비닐봉지와 각종 살림살이, 빈 소주병이 널려 있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박스도 깔지 않은 채 누워 잠을 청하는 누군가는 직사각형 햇볕을 이불처럼 덮었다.

서울역 사람들은 봉사단체와 종교기관을 통해 배식을 받으며 끼니를 해결한다. 외투와 신발, 양말을 나눠줄 때도 있지만 겨울엔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을 먹지 못하는 날엔 굶기 외에 선택지가 거의 없다고 했다.

15일 오후 서울 지하철 을지로입구역에서 생활하는 남성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있다. 22.11.15/뉴스1 ⓒ 뉴스1 이비슬 기자

◇막차 보낸 뒤 조용한 집, 지하철역

서울 명동 거리에 비가 내린 지난 15일 밤. 취객이 비틀대며 내려온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출입구 계단 끄트머리에 한 남자가 침낭을 깔고 앉았다. 남자는 막차가 끊길까 발걸음 서두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남자의 옅은 회색 옷소매는 닳고 닳아 구멍이 뚫렸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 근처에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남은 옷감이 따라 흔들렸다. 체구보다 훨씬 커 보이는 옷, 얇은 소재 아래로 마른 팔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싸늘한 냉기가 옷깃을 파고드는 밤에도 남자에겐 바람을 막을 상자 한 장이 없다. 차가운 바닥 위에 깔아둔 얇은 황토색 담요 하나와 때 묻은 남색 침낭은 올겨울을 날 그의 유일한 보호막이다. 남자 옆에 나란히 자리를 마련한 3명은 '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중 눈빛이 형형한 남자가 잠들지 못하고 앉아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1년째 이곳에서 생활 중인 남자는 이름도 나이도 비밀이라며 자기 입술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갖다 댔다.

도톰한 롱패딩 점퍼를 입은 그는 새것이나 다름없는 등산화 한쪽을 벗으며 오전에 갈아신은 양말을 보여줬다. 이날 유독 외모가 말끔한 이유는 구세군 이동목욕서비스 차량이 왔다 간 덕분이라고 했다.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한 구세군이 자선냄비 모금을 하고 있다. 2021.12.23/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털모자를 눌러쓴 그의 관자놀이쯤에는 납작한 분홍색 귀마개가 걸쳐져 있었다. 겨울을 대비해 봉사단체가 제공한 방한용품이다. 은박 돗자리 위에 겹겹이 올린 담요를 들치자 봉사단체로부터 받은 마스크 수십장이 가득 깔려있었다.

중국집 주방장으로 일한 과거를 떠올릴 때는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지하철역에서 살기 전까지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고시원 생활을 청산했다. 10년째 받던 기초생활 수급도 일부러 포기했다.

그는 "고시원에선 매일같이 지인들과 술판을 벌였다"며 "바닥에서 잔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이제 마음은 더 편하다"고 말했다.

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은 이곳에서조차 쫓겨날까 걱정하며 사소한 질문에도 손사래를 쳤다. 때 묻은 침낭을 뒤집어쓰고 역 바깥 계단에 앉아있던 이모씨(56)는 "내 말 한마디에 그나마 받던 지원도 없어질까봐 걱정된다"며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이씨가 앉아있던 계단엔 광택나는 코트 아래 칼주름이 잡힌 남자 직장인들의 바짓단이 바쁘게 지나갔다. 겨울은 유난히도 가난이 눈에 보이는 계절이다.

b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