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깜깜이 선거’ 치른 장애인들…5년 뒤엔 해결 될까

발달장애인들 10년째 '쉬운 공보물·투표용지' 투쟁
법에 보장된 시각장애인 공보물도 여전히 미비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회원들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장애인복지관 4층에 마련된 제 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소에서 퍼포먼스 의상을 입고 투표에 나서고 있다. 2022.3.4/뉴스1 ⓒ News1 이비슬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지난 4일 발달장애인 박현철씨(35)는 '유령'을 의미하는 '가오나시' 복장을 하고 사전투표장에 들어섰다. 가오나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이름은 '얼굴이 없음'을 뜻한다. 박씨는 자신을 포함한 발달장애인들이 가오나시처럼 대한민국에서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대우를 받기에 이 같은 복장을 하고 투표장을 찾았다고 했다.

이날 박씨가 방문한 서울 종로구의 사전투표장 앞에서는 장애인 단체의 참정권 보장 요구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석한 장애인 당사자들은 제도적 문제로 헌법에서 명시한 참정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고 외쳤다. 특히 이들은 발달장애인이 제대로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쉬운 선거공보물 배포'와 '그림·사진·기호 등이 포함된 투표용지 도입'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이런 제도들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는 발달장애인들에게 선거 과정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들 중 상당수가 한글을 완전히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발달장애인이 어려운 한자어와 전문용어가 가득한 선거공보물의 내용을 숙지하기 힘들어한다.

또 일부 발달장애인들은 투표지에 나와 있는 후보자의 이름이나 정당명도 쉽게 인식하지 못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달장애인들은 스스로가 누구에게 투표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투표소에서 혼란만 겪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기에 장애인 단체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정부가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을 만들고 그림·사진·기호 등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도입할 것을 주장해왔지만 제도는 변하지 않았고 장애인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또다시 깜깜이 선거를 치뤘다. 대선 결과로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언제쯤이면 이 요구사항들이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18년 6월8일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일을 맞아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서 한국피플퍼스트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발달장애인의 평등한 참정권 보장을 촉구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장애인 당사자들은 사전투표를 위해 투표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2018.6.8/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지켜지지 않은 4년 전 약속

2018년 6.13지방선거의 사전투표가 있던 6월8일 오전 9시 문재인 대통령은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 주민센터를 찾았다가 참정권 보장 집회를 하는 장애인 단체를 만났다.

이때 발달장애인들은 문 대통령에게 그들을 위한 쉬운 공보물 제작, 그림·사진이 담긴 투표용지 제작 등을 요청했고 대통령은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잘 살펴보겠다"고 화답했다. 대통령은 집회 참여자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하며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2022년 20대 대선에서도 관련 제도는 변하지 않았다. 대선에 뛰어든 14명의 후보자 중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쉬운 공보물을 배포한 후보는 없었다. 김수원 피플퍼스트 활동가는 "후보자 중에서 발달장애인만을 위해 공보물을 만든 경우는 없었다"라며 "다만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홈페이지에 장애인 정책 관련해서만 쉽게 설명한 게시물을 올렸다"라고 밝혔다.

오히려 민간이 나서서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공보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 모임'이라는 단체는 진보 성향의 심상정 정의당 후보, 이백윤 노동당 후보, 김재연 진보당 후보의 공약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자를 배포했고 사회적기업인 '소소한소통'도 이번 대선의 주요 후보였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10대 공약을 쉽게 정리한 자료를 공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측은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이나 사진·그림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직선거법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에서는 시각장애인에 대해서만 별도의 장애인용 선거공보물을 배포하도록 하고 있고 투표용지에도 소속 정당명과 기호, 후보자 이름만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발의된 법안들은 국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사진과 소속정당을 상징하는 그림이나 상징을 표시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까지 소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대선 본투표일을 한달 앞둔 지난 2월9일에 열린 소위에서 해당 안건이 상정이 되기는 했지만 여·야는 코로나19 확진자 투표 방식을 결정하는 데 집중하느라 이 법안은 논의되지 않았다.

이에 발달장애인 단체는 지난 1월 말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이번 소송을 담당한 김윤진 법무법인 동천 변호사는 장애인 당사자들과 시민단체 등에서 10여년간 같은 요구를 했지만 기술 보급 문제, 예산 문제 등의 이유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더욱 적극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소송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시각장애인 권남희씨(30)가 김동연 새로운물결 후보가 배포한 공보물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 후보는 공보물에 시각장애인용 QR코드를 첨부하기는 했지만 권씨는 QR코드만 기재한 경우 시각장애인 혼자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뉴스1

◇법에 명시된 시각장애인 공보물도 미비

현행 공직선거법에서도 대선의 경우 후보들이 3가지 종류의 시각장애인용 선거공보물을 배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유형의 장애인용 공보물의 경우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하지 않고 있어 모든 종류의 공보물을 제공하는 후보는 드물다.

실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중앙선관위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법에서 규정한 시각장애인용 공보물 형태인 점자형 선거공보, 인쇄물 접근성 바코드(QR코드), 디지털 파일 저장매체(USB) 3가지를 모두 제출한 후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 오준호 기본소득당 후보, 이경희 통일한국당 후보뿐이었다.

옥은호 새누리당 후보는 시각장애인용 공모물을 3종류 모두 제출하지 않았으며 김동연 새로운물결 후보와 김민찬 한류연합당 후보는 QR코드만 공보물에 첨부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이백윤 노동당 후보, 조원진 우리공화당 후보는 인쇄물 QR코드와 USB를 제출하지 않았다. 공직선거법 제65조에 따르면 대선 후보는 점자형 선고공보 대신 QR코드로 대체할 수 있고 USB 제공 또한 선택 사항이기 때문이 이를 강제할 수는 없다.

이 공보물들을 직접 받아본 중증 시각장애인인 곽남희씨(30)는 일단 각 후보들이 보내온 점자형 공보물의 종이 크기부터가 제각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점자형 공보물 대신 기존의 전단형 공보물에 QR코드만 표시해 보낸 김동연 후보의 공보물을 내보이며 "점자를 보지 말고 이렇게 보래요"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QR코드만 있는 경우 이를 시각장애인 본인이 직접 찾아서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곽씨는 선거공보물 내용에도 불편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장애인 유권자에게 보낸 공보물 중 글자만 빼내서 점자형 공보물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진이나 그림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어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공보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어나 신조어가 있음에도 이를 설명해 주는 문구가 따로 담겨 있지 많아 전체 내용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비장애인이 받아본 공보물에 실려 있는 내용이 장애인용 공보물에는 빠진 경우도 있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이번 대선의 주요 후보들이 제출한 점자형 공보물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경우 비장애인용 책자형 공보물에 담겼던 내용 중 5페이지의 내용이 시각장애인용 점자형 공보물에서는 빠졌다. 빠진 내용 중에는 윤 후보의 공약을 요약한 '윤석열의 내일을 바꾸는 10대 약속' 페이지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김상화 농아사회정보원 원장이 제작해 배포한 수어형 선거공보물 내용 중 일부(김상화 원장 제공)ⓒ 뉴스1

한편,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의 경우에도 한글로만 기재된 공보물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화형 선거공보물'의 배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2010년부터 각종 선거에서 배포된 공보물을 수화로 해석해 보여주는 청각장애인용 동영상을 제작해온 김상화 농아사회정보원 원장은 "청각장애인 중 한국 수어를 쓰는 농아인의 경우 한국어가 제2 언어고 수어가 제1의 언어"라며 한국어와 수어는 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농아인들의 경우 공보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수화형 공보물 제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의 경우 한글도 배우기 때문에 읽을 수는 있지만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며 "마치 비장애인들에게 12년 동안 영어를 배웠으니 영어로된 공보물을 읽으라고 보내주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정치권에 수어공보물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면서도 비용 등의 면에서 부담스러워한다며 법을 개정해 청각장애인에 대한 공보물 제작을 의무화하고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potgu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