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제는 가야지"…철 지난 공식에 갇힌 대학정책[변기용의 교육 포커스]

편집자주 ...필자는 1991년 제35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후 경북대 교무과를 시작으로 교육부의 정책 기획 부서에서 16년간 근무하면서 실제 정책을 입안했다. 2002년부터 3년간 OECD 교육국(프랑스 파리)에서 상근 컨설턴트로 국제적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수행했다. 2008년에는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현재 고려대 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한국근거이론학회 회장, 한국교육행정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변기용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변기용 고려대 교수/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짧은 시간 동안에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구조적 모순들이 1997년 외환 위기를 통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전 국민과 기업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한 팽창을 거듭해 온 우리 고등교육 체제도 지금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 정책을 계기로 그동안 축적돼 온 모순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2000년 이후 역대 정부가 추진해 오고 있는 대학구조개혁 정책을 보면서 필자는 실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는 달성하고자 하는 명확한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비용' 4년제 사립대 중심으로 설계된 한국 고등교육 체제

현재 우리 고등교육체제는 사립대학에 의존한 압축적 팽창의 유산으로 4년제 일반대학이 중심이 되는 '고비용-저효율 체제'의 특성을 보인다.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는데도 대부분의 학생이 고교 졸업 후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4년제 사립대학에 일률적으로 진학하도록 설계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는 달리 극히 소수의 엘리트 대학을 제외하고는 이제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것보다는 ①자신이 수행할 직무에 필요한 역량을 키워줄 수 있는 양질의 교육을 ②자신이 처한 환경과 여건에 맞게 ③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보다 중요한 것이 됐다.

쉽게 말해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4년제 대학인가 여부보다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가, 등록금이 저렴한가, 접근이 용이한가 등 현실적 문제가 보다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미국은 '저비용' 주립 커뮤니티 칼리지가 중요한 역할 담당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의 경우 주립 정부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가 전체 고등교육 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커뮤니티 칼리지는 저렴한 학비와 유연한 재학 방식(재직하면서 필요한 교과목만 수강, 학점당 등록제, 야간제 등)을 통해 학습자 친화적인 직업·평생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는 이런 커뮤니티 칼리지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하나씩 설립돼 있다. 마치 서울의 한 구에 하나씩 주민들 누구나 필요하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비용의 공립대학이 하나씩 있는 셈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고교 시절부터 공부에 관심이 있는 최상위권 학생들은 소수의 연구중심대학(예를 들어 버클리 대학, UCLA 등)에 진학하고, 그다음 층위의 학생들은 교육중심대학에 진학한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언제든 교육·연구중심대학으로 편입

의무 무상교육으로 진행되는 초·중등 교육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학업에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한 학생들은 일단 먼저 취업을 하고 취업 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한다.

주로 2년제로 운영되는 커뮤니티 칼리지 재학 중 추가적 학습이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교육중심대학이나 연구중심대학의 학부과정으로 편입할 수 있는 공식적인 온오프라인 편입학 정보제공 시스템(assist.org)도 튼실하게 구축돼 있다.

◇우리나라도 '저비용·고효율' 고등교육 체제 만들려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저비용-고효율 고등교육 체제'를 만들 수는 없을까.

대학이 넘쳐나는 이 시기에 미국과 같은 주립(공립) 커뮤니티 칼리지를 별도로 설립할 수 없다면,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대학 내의 직업·평생교육 단과대학('공영형 단과대학')이나 고용노동부 소관 '폴리텍대학'과 유사한 정부 지원형 공영형 전문대학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공영형 전문대학에서 2년간 저렴한 비용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여건과 필요에 맞게 융통성 있게 학업을 수행한 후 4년제 일반대학·사이버대학으로 편입할 수 있는 개방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학생들이 철이 들어 공부하기 때문에 교육적 측면에서 효과적이며, 특히 현재 정치적 구호에 그치고 있는 '반값 등록금'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4년제 사립대학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 대학에 갈 필요도 없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경쟁 지향적 정부 정책이 '대학 간 역할 분담과 연계' 걸림돌

그렇다면 이제까지 왜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 간 역할 분담과 연계'를 기반으로 하는 이런 저비용-고효율 시스템 구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을까.

필자가 볼 때 먼저 지나치게 대학 간 경쟁에 치우친 정부의 정책이 큰 몫을 했다. 경쟁 지향적 정책은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다양한 고등교육기관 간 적절한 역할 구분과 연계 체제 구축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상생을 위한 건전한 고등교육 생태계 조성보다는 자기 대학이 생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상황에서 개별 대학의 선택은 언제나 연계와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에 방점이 있었다. 심지어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4년제 사립대학과 사이버대학, 전문대학, 그리고 같은 지역의 거점 국립대학과 중소 규모 국립대학 간에도 연계와 협력은 남의 이야기가 되고 있을 정도다.

◇부처 할거주의…전문대 존폐 위기인데 폴리텍대 우후죽순 신설

이에 더해 정부 부처 간에 존재하는 해묵은 할거주의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들어 교육부 소관 전문대학은 대부분 존폐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고용노동부의 폴리텍대학은 이를 비웃듯 우후죽순처럼 새롭게 설립돼 왔다. 투입되는 예산도 폴리텍대학 1개에 지원되는 정부 예산이 교육부 소관 130여개 전문대학에 지원되는 예산과 거의 맞먹는다.

각 지역에 폴리텍대학을 신설하기 전에 권역별로 이미 존재하는 전문대학, 특성화고등학교 교육을 위해 구축돼 있는 공동실습소 등을 활용하는 방안들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았을까. 2000년대 이후 폴리텍대학의 무차별적 신설이 고용노동부나 폴리텍대학을 넘어 과연 전체 학생과 사회를 위해 타당한 것이었을까.

◇'득표'가 우선인 정치권…'이념 차이'를 '교육개혁'으로 호도

마지막으로 우리 교육정책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은 '문제의 본질'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정치인들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

이들은 말로는 교육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선거에 임하면 '소속 정당의 득표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정책을 개발한다. 패거리 사고(group thinking)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선거 캠프에서 짧은 기간 동안 내 편과 적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틀 짓기(framing)를 하면서 이념의 차이를 마치 교육개혁인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논쟁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도움 되는 좋은 교육정책 나오려면 '실용'이 우선돼야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정책이 나오기 어렵다.

내 주장이 옳다고 하여 상대방의 의견에 완전히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서로 의견이 다를수록 개방적인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통해, 무엇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정책인지를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바람직한 정책 대안들을 숙성시켜 나가야 한다.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파나 이념이 아니라 실용이 우선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