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 흙 부적써야 나쁜 기운 없어져"…세계문화유산 '선릉' 훼손 전말
'길상토' 채득하러 갔다가…범행 부추긴 연인도 함께 기소
둘다 집행유예…재판부 "죄책 가볍지 않지만 피해 경미"
- 홍유진 기자

(서울=뉴스1) 홍유진 기자 = 지난해 8월 14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선릉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봉분 아랫부분에 주먹만 한 크기로 흙이 파헤쳐졌다.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그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가 안치된 무덤이다.
신고를 받고 용의자를 추적하던 경찰은 범행 발생 15시간 만에 50대 여성 이 모 씨(55)를 긴급 체포했다. 이 씨는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왜 그랬을까. 사건의 내막에는 숨겨진 인물이 있었다. 이 씨의 연인 한 모 씨(69·남)가 주인공이다.
둘의 인연은 2020년 한 대학원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제주 신앙 관련 동아리에 참가하면서 한국 토속신앙에 심취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던 중 이 씨가 만성신부전증 등으로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가족들의 건강까지 악화하자 한 씨는 명리학과 사주에 밝은 대학 후배 A 씨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기운이 좋다고 느끼는 날을 택해 집 근처 산이나 왕릉에 가서 사람이 밟지 않은 흙을 구해와라. 그런 다음 흙을 고운 채로 쳐서 물감을 섞어 부적을 쓰고, 그 부적을 8방으로 묻은 뒤 염불하면 나쁜 기운이 없어진다."
이들은 A 씨의 이 같은 조언을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먼저 이 씨가 일명 '길상토'를 취득할 장소로 선릉을 골랐고, 한 씨는 '왕토채득지길일'이라며 범행 일자를 택했다.
결국 이 씨는 범행 당일 새벽 2시 반 1.8m 높이의 담장을 넘어 선릉에 침입한 뒤 호미와 곡괭이를 사용해 지름 10㎝, 깊이 17㎝의 흙을 파내어 비닐봉투에 담아갔다. 이 씨가 파간 흙의 무게는 1.66㎏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한 씨는 범행하기 좋은 날을 지정해 주고, 이 씨에게 "여보 사랑해요 힘내세요", "당황할 것 없이 차분하게", "기운 좀 내고 파이팅해요"라고 말하는 등 범행을 방조한 혐의를 받는다.

결국 이들은 문화유산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이 씨에게는 건조물 침입 혐의, 한 씨에게는 건조물침입방조 혐의도 각각 적용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부장판사 조형우)는 최근 이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한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선릉은 현세대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함에도 피고인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개인적 사정으로 선릉을 손상했다"며 "국가지정문화유산의 보호와 계승 차원에서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고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봉분 하단부 봉토가 파헤쳐져 손상됐으나 그 피해가 비교적 경미하고, 피고인이 파낸 봉토가 압수돼 피해가 대부분 회복됐다"며 "평소 토속신앙에 심취해 사건범행을 저지른 걸로 보이는바, 다소나마 참작할 사정이 있다"고 덧붙였다.
cym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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