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통 끝낼 수 있다면"…'존엄사' 헌재 판단은[세상을 바꿀 법정]

⑨존엄사 입법부작위 헌법소원 심판회부
암 환자 가족 헌소 냈지만…"사회적 합의 필요" 2차례 각하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인 동시에 나침반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법정에서 나침반의 방향을 돌려놓을 사건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세상을 바꾼 법정' 시리즈를 통해 과거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대체됐는지를 살펴본 데 이어 '세상을 바꿀 법정' 시리즈를 통해 나침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짚어봤다.

조력 존엄사를 주선하는 스위스의 비영리기관 '디그니타스'. (홈페이지 갈무리)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희귀난치병 환자 당사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보장해 달라"며 헌법소원을 내면서, 이른바 '존엄사'를 제도화하지 않은 입법의 부재가 헌법재판소의 도마 위에 올렸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변호사 단체 '착한법 만드는 사람들'과 한국존엄사협회가 척수염 환자 이명식 씨와 이 씨의 딸을 대리해 낸 존엄사 부진정입법부작위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 중이다. 이번에 헌재가 결론을 내리면 존엄사 입법부작위에 대한 세 번째 판단이 된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28일 사건 접수 후 20일 만인 지난 1월 16일 '심판 회부'를 결정하고 본격적인 심리에 착수했다. 헌재는 2017년과 2018년 암 환자 가족이 낸 같은 취지의 헌법소원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각하한 바 있다.

◇ 돌연한 희귀난치병에 스위스행 결심했지만…동행인이 처벌받아

이 씨는 2020년 알레르기 치료를 위해 주사를 맞은 뒤 돌연 척수염 진단을 받았다. 이후 수년간 가슴과 배, 두 다리에 24시간 내내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불규칙적으로 근육이 경직되는 등의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발가락이 괴사해 일부를 절단했고, 하반신 마비로 인해 딸의 간병을 받으며 삶을 이어 왔다.

이 씨는 증상의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고 마약성 진통제로도 고통을 다스릴 수 없는 상황에서 조력 존엄사를 주선하는 스위스의 비영리기관 '디그니타스' 회원으로 정식 등록했다.

조력 존엄사란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 뜻으로 의사의 약물 제공 등 조력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말하는데, 디그니타스에서는 조력 존엄사를 받으려면 반드시 동행인이 있어야만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씨는 딸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이동하는 순간 딸이 자살방조죄로 처벌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결국 딸과 함께 헌법소원에 나섰다.

심판 대상 조항은 형법 252조 2항의 '촉탁승낙살인죄'와 '자살방조죄'다. 이 조항은 사람의 촉탁이나 승낙을 받아 그를 살해한 사람, 사람을 교사하거나 방조해 자살하게 한 사람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다.

법률이 존엄사를 허용하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불완전‧불충분한 입법 상태로, 행정부가 이를 입법할 의무가 있다는 데 대한 헌재 판단도 함께 구한다.

◇ "수용 불가능한 고통 죽음으로만 끝난다면…예외적 인정해야"

청구인 측은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현행법 제도는 이 씨의 헌법상 기본권인 자기결정권은 물론, 가족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까지 침해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청구인 측은 청구 이유를 통해 "환자가 겪는 수용 불가능한 육체적 고통, 그 정도로 예상되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 곁에서 의무적으로 부양하며 힘들어하고 있는 가족의 정신적 고통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최고조의 고통"이라고 밝혔다.

또한 "자기 생명에 대한 무제한적 처분권은 인정되지 않지만, 현대 의학으로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진입했고 수용 불가능한 고통을 종결시키는 방법이 유일하게 죽음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예외적인 경우 존엄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인정된다고 볼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도 도입에 대한 여론도 긍정적이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한국리서치가 2022년 7월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가 '조력 존엄사 입법화'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행 기관에서 사용되는 연명의료계획서. 2017.10.23/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 의료계 "호스피스 확충이 먼저"…종교계 "조력자살 '선택 아닌 의무' 우려"

다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의료계의 경우 존엄사 제도를 마련하기 이전에 간병 체계나 호스피스를 확충하는 것이 먼저라고 보고 있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도록 한 '연명의료결정법'이 불과 2016년에야 제정돼 2018년 시행되는 등 안정적인 정착 단계에 들어서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안규백 의원이 대표발의한 '조력 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 "호스피스 완화의료 대상 질환의 확대를 비롯한 환자들의 삶의 질 개선, 우울증 등 정신의학적·심리사회적 지원을 위한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또한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뿐만이 아니라 말기 환자로 확대해 연명의료 여부에 관한 논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도록 하는 입법 논의와 정책 마련이 더 실효적"이라고 제언했다.

종교계는 원천적으로 제도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만큼 개인의 자유도 이에 우선할 수 없으며, '존엄사'라는 표현을 통해 조력자살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의사조력자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는 "조력자살이 법제화되는 순간 생애 말기 환자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의 조력자살은 선택이 아니라 점차 의무가 될 것이며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위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 제정 25년간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점점 경제적인 이유로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라고 부연했다.

헌법소원 사건의 결론이 나기까지는 통상 1~2년가량이 소요된다.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큰 만큼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법무부로부터 의견서를 제출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공개 변론을 하게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maum@news1.kr